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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이혼 합의서는 내가 이미 사인해서 고수혁에게 넘겼어. 지금 고수혁은 서아현 씨와 불타는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어떻게 나에게 관심이 있겠어? 주 전무님은 이번 판을 잘못 짜셨어.’ 나는 제자리에 앉은 채 묵연한 저항을 이어갔다. 하지만 뜻밖에도 주현성은 나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자기 자리와 맞바꿔 앉혔다. 그는 고수혁을 향해 아첨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대표님, 저희 신입 사원 윤세영 씨인데, 분위기 띄우는 걸 잘합니다. 오늘 대표님 잘 챙기라고 특별히 데려왔습니다.” 주현성의 그 말에 나는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고수혁이 갑자기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결혼 생활 내내 기혼 사실을 철저히 숨기기만 하더니, 이제 이혼할 때가 되니 우리 관계를 세상에 알리려는 거야?’ 하지만 나는 고수혁이 나에 대한 감정을 과대평가했던 것 같았다. ‘고수혁은 이미 서아현 씨와 공개적으로 연애 중이고, 모두가 그들을 완벽한 커플로 여기고 있는데, 대중 앞에서 나와의 관계를 인정할 리 없어.’ 나의 손목을 꽉 움켜쥔 그의 까만 눈에는 기쁨인지 화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그러더니 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세영 씨, 내가 무슨 사람 잡아먹는 맹수라도 되나? 술 한 잔 따라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건가?” 고수혁의 불쾌한 어조에 룸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현성은 겁에 질려 내 귀에다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세영 씨, 어떻게 해서든 고 대표님을 잘 모셔! 이 일을 망치면, 윤세영 씨와 전민지 씨 둘 다 잘릴 줄 알아!”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일자리를 잃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전민지는 아이를 가졌다. 게다가 그녀의 자라온 가정 환경을 고려하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고 자리에 앉은 나는 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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