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임도현이 커다란 손으로 트렁크를 잡고 눌렀다.
“또 왜 이래? 미쳤어?”
“밤늦게 또 무슨 소란이야?”
임환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때문에 나랑 네 엄마 세계 일주 여행도 못 가게 됐어. 효진이처럼 철 좀 들면 안 돼?”
‘허허. 또 세계 일주 여행이야?’
전생에 임이서가 정신병원에서 온갖 고초를 겪을 때 그들에게 수없이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사가 모두 그녀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며 철 좀 들라고 했다. 그리고 세계 일주 여행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결국 임효진이 다른 정신환자들에게 맞아 다치고 나서야 돌아와서 임이서를 잠깐 들여다봤다.
그때가 그들이 가장 매정했던 때였고 그녀를 직접 죽음으로 몰아갔다. 임이서는 세상에 이렇게 무책임한 부모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냉랭한 얼굴로 그들을 보면서 반박했다.
“저보고 철이 들라고요? 저를 집에 데려와서는 그냥 방치하고 낡은 창고 방에 가둬 놓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했잖아요. 이 집에 온 지 1년이나 됐는데 임씨 가문의 딸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대우조차 받지 못했어요. 돈이나 명예는 고사하고 생활비도 아르바이트해서 직접 벌었다고요. 당신들은 저한테 뭘 줬는데요?”
임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잘못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임이서의 무례한 태도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임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럼 얼마나 더 줘야 만족하는데? 만나기만 하면 돈을 달라는 못된 버릇은 대체 언제 고칠 거야?”
최송연도 노파심에 거듭 말했다.
“생활비를 적게 준 건 맞지만 안 준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엄마 아빠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한 것도 다 널 위해서야. 나중에 시골에서 들인 나쁜 버릇을 고치면 그때 원하는 대로 다 줄게.”
임이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웃겨서 원. 당신들이 말하는 저를 위한 거라는 게 집에서 도우미보다 못한 생활을 하게 하는 건가요? 도우미는 월급이라도 받지, 저는요?”
임환과 최송연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평소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 집안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고 그저 아들들이 임이서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녀가 실제로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집에 남아 있는 큰아들과 막내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첫째 임도현이 카드 한 장을 건넸다.
“지금 난리를 피우는 이유가 돈 때문이지? 이 카드 안에 2억이 있어.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임이서가 비웃듯 웃었다.
“그 돈은 그쪽 귀한 여동생한테나 줘.”
“언니,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용서만 해준다면 언니가 원하는 거 다 줄게.”
임효진이 자책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임이서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럼 부모님이 너한테 선물한 천사의 눈물을 줘. 줄 수 있겠어?”
임효진이 입술을 깨물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몹시 억울해 보였다.
“임이서, 적당히 해.”
임지성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모습에 임이서가 코웃음을 쳤다.
“아까우면 통쾌한 척하지도 마. 임씨 가문의 딸이라는 신분 따위 난 필요 없어. 네가 좋아한다면 그냥 너 줄게.”
그러고는 트렁크를 낚아채고 별장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허리를 곧게 편 채 내딛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단호했다.
이런 임이서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가족들은 그대로 멍하니 굳어버렸다.
임효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임이서의 행동은 임씨 가문 사람들과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게 했으니까.
하지만 겉으로는 초조한 척 연기했다.
“언니 정말 가버렸어요...”
“그냥 우리한테 삐쳐서 저래.”
최송연이 임효진을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며칠 밖에 있다 보면 버티지 못하고 알아서 돌아올 거야.”
임환이 버럭 화를 냈다.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 우린 너 같은 딸이 없다고 생각할 테니.”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서 떠나겠다고 협박하면 먹힐 줄 아나 본데 역시 넌 아직 너무 순진해. 절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이번에 뜻대로 하게 놔두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몰라.’
임이서가 발걸음을 멈추고 웃었다.
“차라리 잘됐네요. 오늘 당신들과 완전히 연을 끊겠어요. 이 집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단호했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젖은 옷 때문에 모습이 초라해 보여도 발걸음만큼은 매우 단호하고 굳건했다.
임씨 가문 사람들은 잠깐 넋을 잃었다가 곧 임이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먹을 걸 안 줬어, 입을 걸 안 줬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임지성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정말 미쳤어. 우리 임씨 가문을 떠나서 어떻게 사는지 두고 볼 거야. 아 참, 쟤가 지금 다니는 귀족 학교도 큰형이 넣어준 거잖아. 우리랑 연을 끊겠다고 했으니 깔끔하게 끊어야지. 형, 교장 선생님한테 연락해서 퇴학시켜버려. 그럼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러 올 거야.”
임이서가 임씨 가문을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곳이 바로 학교라는 걸 임효진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 꼼짝없이 돌아와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빌 것이다.
임도현이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우리 가문을 떠나면 연성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는 걸 알려줘야지.”
그 말에 임효진은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임환과 최송연 또한 반대하지 않았다. 임이서에게 쓴맛을 좀 보여줘야 순순히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이서가 계속 제멋대로 날뛰면 집안이 편할 날이 없을 텐데 어떻게 마음 놓고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