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임이서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아무래도 직접 교장을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그녀를 임씨 가문으로 데려올 때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이 학교로 보냈다.
사실 임씨 가문에 오기 전부터 임이서는 이미 이 학교 교장과 편지를 주고받던 사이였다.
교장은 임이서에게 고등학교에 와서 공부하라며 학비 전액 면제는 물론 3년 동안 생활비까지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었다.
그때는 거절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 어머니와 할머니를 보살필 수 있으니까.
그 후 임씨 가문에서 찾아와 어머니와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나서야 이 학교에 왔다.
하여 임씨 가문 사람들은 임이서가 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지 여부는 그들이 좌지우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온전히 임이서의 의지에 달려 있는데 말이다.
임이서가 이 학교에 다니겠다고 하면 아무도 내쫓지 못할 것이고 다니지 않겠다고 하면 아무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쓸데없는 사람이나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캐리어를 들고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임지성은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임이서의 차갑고 단호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아쉬움이 스쳤다.
과거 임이서는 늘 그에게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혹시라도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전전긍긍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생각에 임지성은 마음이 불편한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오빠, 왜 그래?”
임지성이 계속 문 쪽을 쳐다보자 임효진이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임지성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요 며칠 이서가 좀 이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혹시 어제 엄마 아빠가 나한테 천사의 눈물을 준 것 때문에 충격받은 건 아닐까? 다 나 때문이야...”
임효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자책하는 말투로 말했다.
드물게도 임지성은 그녀를 위로하지 않고 오히려 미간을 찌푸렸다. 임이서의 생일이 어제였다는 걸 깜빡 잊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임효진에게만 값비싼 선물을 준비해줬고 임이서에게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이러는 것도 선물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일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네 잘못 아니야.”
임지성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임효진은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오늘 저 촌뜨기가 너무 쉽게 누명을 벗었어. 내가 쳐놓은 그물이 아무 소용없이 찢어진 것 같잖아. 게다가 오빠도 날 안 좋게 생각하는 것 같고. 빌어먹을 임이서. 그냥 길바닥에서 죽어버릴 것이지. 왜 학교에 돌아와, 돌아오길!’
하지만 돌아섰을 땐 다시 자책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선생님들. 이 일 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헛소문 하나 때문에 이렇게 큰 오해가 생길 줄은 몰랐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감이 끼어들었다.
“이게 왜 네 탓이야? 이런 소문은 근거 없이 생겨나지 않아. 쟤가 평소에 행실이 안 좋으니까 이런 소문이 도는 거지. 자책하지 마. 넌 우리 학교의 자랑이야. 어서 교실에 가서 수업해.”
...
교직원 숙소 건물 아래, 햇살이 늘씬하고 당당한 임이서에게 쏟아졌다.
교장을 찾아가려던 그때 그녀의 귓가에 갑자기 맑고 장난기 넘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 부신 햇살 아래 조금 전 교무실에서 봤던 그 남학생이 서 있었다.
교복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어헤쳐 흰 티셔츠 깃이 드러나 있었는데 젊음의 반항과 자유분방함이 돋보였다.
“예쁜이, 빨리 올라와. 교장 선생님이 교장실에서 기다리고 계셔.”
소년이 크게 외쳤다. 임이서가 바로 움직이지 않자 소년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려 내려와 임이서의 캐리어를 들었다.
“내가 들어줄게.”
임이서는 그가 캐리어를 들어주자 손을 놓았다.
“헤헤, 내 이름은 연정우야. 우리 전에 본 적 있는데 까먹었지?”
“안 까먹었어. 너 반성맨이잖아.”
연정우는 늘 문제를 일으켜 반성문을 썼다. 임이서는 그가 전교생 앞에서 어설픈 반성문을 감동적으로 낭독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다.
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뭐야. 내 말은 우리 PC방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게임 엄청 잘하더라, 너.”
임이서는 그제야 기억이 났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게임 캐릭터 레벨업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PC방에서 우연히 한 게임을 했다가 엄청난 실력을 발휘해 PC방 전체를 놀라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연정우가 다가와 누님으로 모시겠다면서 간식을 잔뜩 사줬었다. 하지만 임이서는 거절했다. 부하를 거느리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야, 임이서, 너 왜 임지성네 집에서 살아? 임지성이랑 무슨 관계야?”
연정우는 늘 그게 궁금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임이서가 임지성네 집에서 도우미 일을 한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게임을 이렇게 잘하는 도우미가 어디 있어? 게다가 도우미가 주인한테 대놓고 대든다고? 오늘 진짜 속 시원하긴 했는데.”
임지성은 학교에서 킹카이자 늘 엄친아 이미지였고 거의 모든 여학생이 그를 짝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선생님들도 매우 좋아했다.
어딜 가든 잘난 척하고 거들먹거려서 연정우는 늘 그를 싫어했다.
임이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나 잘렸어.”
연정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진짜 그 집 도우미였어? 난 또 친척인데 신분을 숨기려고 도우미라고 거짓말한 줄 알았어. 그런 거짓말을 하는 재벌들이 흔하거든.”
임이서가 시선을 늘어뜨린 순간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쳤다. 재벌들은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니, 그 실력으로 왜 그 집의 도우미로 일해? 연성에서 임씨 가문이 최고 재벌이긴 하지만 도우미 한 달 월급이 게임 아르바이트 일주일 해서 버는 것보다 적을 텐데? 게다가 그 사람들은 널 잘랐고 학교에서까지 내쫓으려 했어. 이건 너무 손해 보는 장사잖아.”
“임이서, 아니면 나한테 와서 게임 아르바이트할래? 한 달에 2천만 원 줄게. 어때? 그리고 학교에 계속 남을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어.”
임이서가 연정우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네 할아버지가 게임하는 거 허락하셔?”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학부모를 학교로 부른 이유가 연정우가 수업을 땡땡이치고 PC방에 가서 게임하다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하. 할아버지?”
연정우가 박장대소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다가 남자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한 순간 웃음이 굳어버린 채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아니, 상전님, 이서 데려왔어요.”
연정우는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을 만큼 후회했다. 이게 다 임이서가 할아버지라고 잘못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임이서를 몰래 흘겨봤다.
남자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연정우의 머리에 딱밤을 때렸다. 어찌나 아픈지 연정우는 머리를 감싸 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람의 모습에 임이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연정우더러 날 데리러 오라고 한 게 이 남자였어? 대체 무슨 뜻이지?’
남자는 다시 임이서를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렇게 늙지 않았어. 항렬이 좀 높을 뿐이야.”
그 모습에 연정우는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전님 방금 이서한테 설명했어? 이건 뭐지? 오늘 평소랑 너무 다른데? 설마 이서한테 반한 거야? 이서가 예쁘긴 한데... 설마... 상전님은 여자한테 관심이 없고 항렬도 엄청 높아... 그런데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고?’
연정우는 속으로 쉴 새 없이 생각했다.
임이서는 남자를 계속 빤히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지만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먼저 물었다.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남자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교장이 옆방에서 나오더니 친절하게 웃었다.
“서 있지만 말고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