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임이서, 대체 임씨 가문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
서 교장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걱정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임이서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임씨 가문에서 절 퇴학시키라고 하던가요?”
서 교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근데 내가 동의하지 않았어. 내 학교에서 누가 뭐라 하든 절대 통하지 않아. 게다가...”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옆에 있는 남자를 힐끗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널 위해 나서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른 학교에 더더욱 보낼 수 없거든.”
임이서는 놀란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교장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는데 온몸에서 고고하고 우아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임이서는 점점 의아해졌다.
‘이 남자 대체 누구지? 왜 내 편을 들어주는 거야?’
서 교장이 또 남자에게 말했다.
“도련님, 정우 과외 선생님을 찾고 계시죠? 이서가 잘할 것 같은데 어떠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정우가 임이서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얘가 저를 가르친다고요? 농담이시죠? 이서 우리 학교에 전학 온 후로 시험 4번을 쳤는데 전부 꼴찌였어요. 총점이 저보다도 낮다고요.”
연정우는 자기 성적이 엄청나게 높은 것처럼 자랑스럽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엘리트반에도 못 들어가는 주제에 남 흉볼 처지나 돼?”
연정우는 멋쩍은 듯 코를 만지며 입을 다물었지만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서 교장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난 내 안목을 믿어요. 절대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어요.”
연정우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상전이 동의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의 학업 성적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안 그러면 학교까지 와서 성적을 챙기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 수많은 특례 입학 제안이 있었지만 전부 거절하고 꼭 수능을 보라고 했다.
연정우가 말했다.
“저희 상전님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합시다.”
연정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 남자의 차갑고 경고하는 눈빛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혼란스러움이 더 컸다.
‘상전님이 오늘따라 왜 이러시지?’
임이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전 아직 동의하지 않았는데요.”
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동의하게 될 거야.”
이 남자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지 궁금해졌다. 임이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으면요? 정우가 똑똑하고 배우기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잖아요.”
그 말에 발끈한 연정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임이서에게 손가락질했다.
“멍청한 건 너지. 뉘 집 똑똑한 애가 남의 집 도우미나 하다가 쫓겨나? 창피해서 원.”
임이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남자는 임이서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
“돈이 몹시 필요한 것 같은데.”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쉽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꿰뚫어 본 듯했다.
“정우한테 공부 좀 가르쳐줘. 지난번 월말 평가에서 300점 받았어. 다음 월말 평가에 성적이 오르면 1점당 200만 원씩 줄게.”
그 말에 임이서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연정우는 머리가 나쁜 게 아니었다. 단지 공부에 진지하게 임해본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전생에 열등반에 들어간 후에야 재벌 집 아이들은 성적이 아무리 나빠도 특례 입학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등반에서 특례 입학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녀와 연정우뿐이었다.
임이서는 연정우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배경이 없어 수능만이 답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배경이 너무 좋아도 수능을 반드시 봐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매일 힘든 나날을 보냈고 반 학생의 절반이 그녀를 괴롭혔다.
연정우가 가끔 임이서를 도와주긴 했지만 대부분 학교에 없었고 PC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결국 누굴 건드린 바람에 수능 며칠 전에 골목길에서 폭행을 당해 수능을 보지 못했다.
그가 도와줬던 걸 생각해서라도 이번 생에서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게다가 연정우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했다. 그것은 곧 그녀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남자는 임이서를 빤히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능 성적이 1등급을 넘으면 커트라인을 넘은 1점당 2천만 원씩 줄게.”
임이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박, 집에 금광이라도 있나? 돈이 이렇게 많다고?’
엄청난 유혹에 임이서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좋아요. 한번 해볼게요. 하지만 돈 때문이 아니에요. 정우가 아직 발휘되지 않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대학교도 못 가는 게 안타까워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자 연정우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그 말을 누가 믿어? 돈에 눈이 멀었으면서.”
임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옆에 있던 서 교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 일은 이렇게 하자. 이서랑 정우는 먼저 교실로 돌아가서 수업해. 난 도련님이랑 할 얘기가 좀 남았어.”
임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갈 때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를 다시 한번 힐끗 쳐다봤다.
‘도련님? 교장 선생님이 저렇게 부를 만한 사람이 연성에는 없을 텐데.’
벌써 수업 시작종이 울린 지 꽤 되었다. 연정우는 곧장 교실로 달려갔지만 임이서는 서두르지 않고 캐리어를 끌고 기숙사로 향했다.
이번 생에는 누명을 벗었으나 침대는 여전히 전생과 똑같이 쓰레기 더미로 변해 있었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쓰레기를 가득 채워 넣었고 침대 시트와 이불에 밀크티와 세면용품을 쏟아놓았으며 심지어 매트리스까지 젖어 있었다.
임이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주범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물함에서 여분의 침대 시트와 이불 커버를 꺼내 맞은편 침대로 가서 재빨리 갈았다. 그러고는 침대에 딸린 책상 위의 물건들을 바꿔놓았고 마지막으로 침대 주인을 증명하는 신분 정보까지 바꿔버렸다.
모든 것이 끝나자 기숙사에서 가장 좋은 침대가 그녀의 것이 되었다.
임이서는 새 침대를 보면서 만족스럽게 손뼉을 쳤다.
“음, 좋아. 소중한 줄 모른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녀는 그제야 교과서를 들고 교실로 향했다.
그 시각 엘리트반 교실.
임지성은 교실로 돌아온 후 왠지 계속 시무룩해 보였다.
생일 선물을 검색하려고 휴대폰을 꺼내 이것저것 골라봤지만 임효진에게 준비했던 선물만큼 예쁘고 고급스러운 건 없었다.
결국 아무거나 대충 사주려고 했다.
‘시골에서 굴러다니던 애가 뭘 알겠어.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우리 효진이의 안목과는 비교도 안 되지. 받으면 무조건 보물처럼 아낄 거야.’
“오빠, 나한테 또 선물 사주려고?”
귓가에 들려오는 애교 섞인 목소리에 임지성은 하던 일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보니 여동생이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쳐다보고 있었다. 임지성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녹아내렸다.
“근데 난 이 컬러 말고 이게 더 마음에 들어.”
임효진이 방긋 웃으면서 옆에 있는 분홍색 인형을 가리키자 임지성은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네가 마음에 든다면 사 줘야지. 갖고 싶은 거 또 있어?”
“음... 됐어. 오빠가 준 선물이 너무 많아서 방에 놓을 데도 없어.”
임지성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임효진에게는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선물을 많이 줬지만 임이서에게는?
그제야 임이서에게 제대로 된 선물을 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생각에 임지성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빠, 왜 그래?”
“효진아, 이서한테 줄 선물을 고르려고 하는데 좀 봐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