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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다시는 그 사람에게 집착하지 마

곧 아주 다정해 보이는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바로 주 대표님 댁이에요.” 나는 깜짝 놀랐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아저씨는 지금 집에 계세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표님은 외출하셨어요.” ‘아직 제도에 있다는 건가? 그런데 어떻게 날 구할 수 있었던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에 나는 다시 물었다. “그분이 혹시 저한테 무슨 말씀 남기신 건 없나요?” 그러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언제 돌아오시는지 혹시... 아세요?” 이번에도 똑같은 대답이었고 그들의 표정을 봐서는 정말 모르는 것 같았기에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약을 다 바르고 나자 두 사람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 한 분이 따끈한 국이 담긴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아가씨, 식사하셔야죠.” 그분은 숟가락으로 한 숟갈씩 떠서 정성스럽게 내게 먹여주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집에 도우미가 있었지만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은 없어 조금 멍해졌다. 그 아주머니는 무척 따뜻한 사람이었다. “기운 차리셔야죠. 상처 났을 땐 기름진 건 안 돼요. 그래서 담백하게 끓였어요. 조금 나아지시면 더 맛있는 것도 해드릴게요.” 화림 지역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해서 나도 매운 걸 즐겼지만 그분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난 조용히 감사 인사를 건네며 국을 넘겼지만 마음은 무척 복잡했다. 나는 분명 정신병원에 갇혀 강민지에게 계속 고통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눈을 뜨자 이렇게 따뜻한 공간에 있었고 구출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비록 주성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보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정했고 그 덕분에 내 마음은 처음으로 조금 따뜻해졌다. 아주머니가 방을 나간 후, 나는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기지개를 켰다. 한낮이라 햇볕이 따스하게 방 안으로 들어와 나는 그 햇살 아래 조용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화림 교외인 것 같았다. 주성훈이 이 근처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별장은 주변에 다른 건물도 없고 큰 나무들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어 조용하고 아늑한 환경이었다. 곧 부풀었던 내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했다. 구출된 건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고 나는 여전히 소석진과 강민지의 계략에 직면해 있었다. 학교도 다시 다닐 수 없게 됐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피한다고 해서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는 법, 더구나 내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선 언젠가 마주해야 할 싸움이었다. 하지만 소석진은 내가 정신병자라는 가짜 진단서까지 만들었다. 그건 정말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소석진은 나를 딸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해치려는 마음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다시 주성훈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그러나 소석진은 요즘 심씨 가문와 연결된 듯했다. ‘그래도 아저씨가 과연 날 위해 심씨 가문과 맞서줄까?’ 나는 심씨 가문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아니었다만 고민아가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심씨 가문는 대단한 집안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늘 그들과 친해지려 했다고 했다. 고민아의 집도 부자였지만 제도에서는 돈만으론 부족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아버지는 권력가들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딸을 심씨 가문 어른의 정부로 밀어 넣으려 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심씨 가문은 가풍이 바르기에 그런 얄팍한 속셈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민아의 말대로라면 심씨 가문에 대한 내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런 가문이 어째서 소석진 같은 잔인한 사람을 도와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심씨 가문은 제도에서도 유명한 가문이었다. 아무리 주씨 가문이 권세를 자랑한다 해도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 심씨 가문과 맞서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주성훈은 이미 여러 번 나를 도와줬으니 어머니의 은혜는 그걸로도 충분히 갚은 셈이다. 그러니 더 이상 나 같은 골치 아픈 일에 엮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나는 발코니에 놓인 라운지체어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너무 많은 고통을 겪어서인지 정신이 흐릿했고 어느 순간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다 얼핏 들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여긴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문 앞에서 누군가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또렷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저랑 성훈이 집인데 제가 왜 못 들어가죠?” 이내 문이 활짝 열렸고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들자 문앞에 구소연이 서 있었고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곧 나는 얼떨떨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 안녕하세요.” 구소연은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나를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저는 성훈이 무슨 대단한 미인이라도 숨겨둔 줄 알았는데 고작 당신이었네요?” 구소연은 오늘 흰색 하이넥 민소매 니트를 입고 화장기도 없었지만 햇살 아래선 오히려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사실 진짜 절세미인은 그녀였다. 하지만 지난번보다 적대심이 더 강해졌고 이번엔 그걸 전혀 숨기지도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러자 구소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성훈이가 소은진 씨를 도와준 건 당신 어머니 때문이라는 거 잘 알아요. 그래서 한두 번은 그냥 넘어갔죠. 하지만 계속 이러면 저도 기분이 나빠요. 저는 성훈이 약혼녀예요. 제 남자가 다른 여자랑 얽히는 건 싫네요.” 나는 멍하니 구소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솔직하게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고 동시에 그녀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성훈은 정말 너무 많이 나를 도와줬다. ‘맞아. 나는 민폐를 너무 많이 끼쳤어.’ 결국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구소연은 문틀에 기대어 여유롭게 말했다. “그만 떠나요. 여긴 당신한테 어울리는 곳이 아니니까.” 그토록 직설적인 말인데도 이상하게 화는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황스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주성훈의 약혼자니 이 집의 절반은 그녀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구소연이 나가라면 내가 더 머물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주성훈이 나를 여기에 머물게 한 거였는데 아무 말도 없이 떠나는 건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구소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요. 성훈이는 당신이 말도 없이 나가도 전혀 개의치 않아요. 솔직히 성훈이는 소은진 씨를 그냥 스쳐 가는 남일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다음에 길에서 마주쳐도 얼굴조차 못 알아볼지도 몰라요.”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도 내가 더 버틴다면 그건 정말 뻔뻔한 짓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곧 나갈게요.” 그제야 구소연은 만족한 듯 웃었다. “역시 똑똑하네요.”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건 손뿐이었다. 어제 강민지에게 걷어차인 다리는 약을 발라서인지 통증도 거의 사라졌고 절뚝이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문 앞까지 가자 구소연의 표정은 여전히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이번에도 아저씨 덕분에 살았네요. 그리고 정말 실례했습니다.” 구소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냉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성훈이 찾지 마세요. 더 이상 집착도 하지 말고.” 그녀가 왜 이토록 나를 미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구소연의 감정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지나쳐 방을 나섰다. 여기는 2층이었다. 나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고 내려가려는 찰나, 누군가 계단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실루엣에 나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주성훈이었다. 이번엔 격식을 벗은 캐주얼 복장이었는데 여전히 단정하면서도 느긋한 분위기가 그에게 더 잘 어울렸다. 아니, 오히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주성훈이 아직 제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그는 내 인기척을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깊은 가을 호수처럼 고요한 눈빛, 나는 그 눈과 눈이 마주쳤다. 주성훈의 눈에 담긴 감정을 나는 읽을 수 없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 “아저씨.” 그는 짧게 말했다. “방으로 들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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