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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주성훈한테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주성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분명 아래층에 있었지만 존재감은 나를 훨씬 압도했다. 주성훈의 시선이 나를 가만히 짓누르는 것 같아 숨조차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의 약혼자가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구소연은 아직 위층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이 생겼다고 그걸 곧장 일러바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때, 구소연이 걸어 나왔다. 복도에는 두툼한 카펫이 깔려 있었기에 그녀의 뾰족한 하이힐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했다. 아마 어제 강민지가 하이힐로 내 손가락을 짓밟은 기억 때문에 본능처럼 몸이 움츠러들었다. 구소연은 나를 무시하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가 주성훈에게 다가갔다. 그녀 몸에서는 은은한 장미꽃 냄새가 났다. 내가 잘못 안 게 아니라면 그것은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향수에서 나는 냄새다. 게다가 아무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신분과 지위를 증명해야만 소량으로 구입 가능한 제품이었다. 역시 제도 구씨 가문의 아가씨답게 그녀가 쓰는 모든 것은 그야말로 최고급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주성훈 앞에 멈춰서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성훈아, 언제 돌아왔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냥 달려왔어.” 주성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애정 표현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약혼한 사이였기에 굳이 서로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불편한 마음에 고개를 푹 떨구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구소연이 계속 말했다. “내가 원래 화림에는 잘 안 오잖아? 그런데 성훈이 보고 싶어서 갑자기 왔는데, 이 집에 여자 하나 숨겨놓은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그녀의 말투는 살갑고 장난스러운 듯했지만 그 안에 뭔가 날카로운 게 숨어 있었다. 그건 분명 의도적인 ‘탐색’이었다. 나는 더더욱 긴장했고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주성훈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 나는 고개를 들어 주성훈을 바라봤다. 구소연은 그의 팔을 부드럽게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이제 은진 씨 내보내. 호텔방 잡아주면 되잖아. 여긴 우리 둘만의 집이야. 낯선 여자가 머무는 건 싫어.” 나는 도무지 이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다. 그런데도 주성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곧 구소연은 더 부드럽게 속삭였다. “성훈아, 나도 알아. 사실 너도 억울하잖아. 은진 씨를 여기 머물게 한 것도 그저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걸. 하지만 난 싫어. 다른 사람은 안 돼? 왜 하필 소은진 씨야?” 희생양이라는 그 단어에 나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뜻이지?’ 주성훈이 나를 도운 게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단 말인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온갖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주성훈은 정말 여러 번 나를 구해줬다. 특히 이번엔 정신병원에서 나를 데려와 목숨을 구해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지금도 그 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매일같이 고통받다가 결국 정말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때, 주성훈이 움직였다. 그는 조용히 한 발 내딛더니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구소연은 그 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주성훈은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곧이어 주성훈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으로 들어가.” 여전히 같은 말이지만 이번엔 훨씬 더 단호한 말투였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조용히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그 사이, 나는 구소연의 표정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몹시 화가 났을 것이다. 결국 구소연은 날 쫓아내려 했고 주성훈은 날 머물게 했으니까. 방으로 돌아와 문을 아직 닫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구소연의 날 선 외침이 들렸다. “주성훈,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역시나 구소연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곧이어 주성훈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약혼은 두 집안의 협력 관계를 위한 거였어. 이 사실을 네가 모른다면 차라리 약혼을 파기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들의 약혼이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에 나는 또 놀랐다. 나는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어 얼른 문을 닫아버리고 바깥의 소리를 전부 차단했다. 방 안에 가만히 서 있는 내 마음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문이 벌컥 열렸고 그 너머로 주성훈이 들어섰다. 마침 햇살이 그를 비추며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빛을 등지고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주성훈은 내 앞 두 걸음 남짓한 거리에 멈춰 섰고 고개를 숙여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편히 지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아저씨. 괜히 제가 폐만 끼친 것 같네요.” 주성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어두웠는데 마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게 하는 바다 같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복수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나는 소석진과 강민지에게 잡혀 정신병원에 갇히고 말았고 결국 이번에도 주성훈이 날 구해줬다. 숨 막히는 정적 끝에 주성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라고 생각하지 않아.”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고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지만 곧 구소연의 적대적인 태도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주춤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제가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주성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뚝 끊어버렸다. “아니. 나 곧 제도로 다시 가야 해. 집엔 다른 사람도 없으니까 그냥 여기서 지내.”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제 막 제도로 떠났었는데 오늘 또 화림에 나타났고 이제 다시 간다니?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나 때문에...’ ‘아니야, 아닐 거야.’ 곧 나는 스멀스멀 떠오르는 생각을 부정했다. 주성훈에게는 분명 다른 일이 있었을 거라며 위로했다. 그 일이 사업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단순하게 구소연을 따라왔을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얼마 후, 주성훈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당분간은 몸부터 잘 회복해. 다른 건 내가 돌아온 후에 이야기하자.”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또 한 번 내 말을 잘랐다. “경민이 남겨둘게. 필요한 건 경민이에게 말하면 돼.”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주경민은 주성훈이 제일 아끼고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정한 거야. 그러니 이제 푹 쉬어.” 내가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그는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이윽고 문이 닫히자 주성훈의 넓은 등은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밖에서 구소연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방 안은 방음이 잘 돼 아무것도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등 뒤에 비친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사실 나도 조용히 이곳을 떠날 수 있다. 그들 사이가 나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면 내가 사라지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금 전 분명히 주성훈은 나를 지켜줬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가 어떻게 모른 척 외면하겠는가?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계속 맴돌았고 그에 대한 해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되었지만 나는 계속 방 안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주성훈은 아마 떠난 듯했다. 다만 구소연이 아직 이 집에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가 나를 찾아오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걸로도 감사했다. 밖에 나가 상황을 봐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낮에 봤던 두 명의 여자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 뒤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따라 들어왔다. “검사를 위해 왔습니다.” 진료가 끝난 후, 의사는 내 손은 충분히 회복 가능하다고 말했다. 나는 의학을 전공했으니 내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의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덤덤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의사가 나간 뒤, 두 여자는 방에 남아 내 상처를 치료해 줬다. 그러다 나는 참지 못하고 조용히 물었다. “아저씨는 정말 제도로 가신 건가요?” 그러자 한 여성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대표님께서 지금 이 집에 안 계세요. 그런데 어디로 가셨는지는 저희도 잘 몰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구소연의 행방은 묻지 못했다. 잠시 뒤, 낮에 나를 돌보던 아주머니가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밤이 되고 나는 넓은 침대에 누워 어둠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눈을 감으면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고 외할아버지와 함께했던 따뜻한 유년 시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강민지가 내 인생에 들어오고 나서 엄마가 어떻게 무너져갔는지도 생생히 떠올랐다. 결국 나는 엄마의 마지막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차디찬 유골함만 마주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소석진과 강민지에 대한 증오는 더 깊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올라 좀처럼 식지 않았다. 그렇게 뒤척이던 나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구소연이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어제 보던 그 우아한 여자가 아니었다. 크고 매혹적이던 그 눈동자엔 날카롭고 음침한 기운이 가득했다. 곧 구소연은 냉랭한 말투로 내게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성훈이한테 무슨 마법을 부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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