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결혼
전날 밤 너무 늦게 잠든 탓에 아침에 일어나도 정신이 멍했다.
하지만 구소연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훈이가 당신 때문에 절 쫓아내겠대요. 정말 궁금해서 미치겠어요. 도대체 무슨 마법사라도 돼요? 어떻게 성훈이가 당신 편을 들게 만든 거죠?”
그녀는 손을 들어 내 턱을 움켜잡았는데 눈빛엔 증오가 서려 있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어 급히 해명했다.
“오해하신 거예요. 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저씨에게 부탁했어요. 그리고 아저씨는 제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도와주신 것뿐이에요.”
구소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후, 그녀는 내 턱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하는데 성훈이한테 이상한 감정 품지 마세요. 아니면... 그땐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니까.”
도대체 구소연이 왜 이렇게까지 날 적대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약혼자까지 있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불안하단 말인가?
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 마세요. 그런 마음 가질 리 없어요.”
구소연은 콧방귀를 뀌고는 비웃듯 말했다.
“지나가던 개도 그 말 들으면 웃겠네요. 당신 같은 시골 사람이 뭘 믿고 이 집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높이 올라가봤자 결국은 더 아프게 떨어질 거라고요.”
그녀의 말투엔 선명한 멸시가 담겨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제도에서 손꼽히는 가문. 그녀는 그 명문 구씨 가문의 딸이었다.
그러니 나랑은 원래부터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헛된 꿈을 꾸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든 구소연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니 괜히 더 화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곧 구소연은 더욱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눈 뜨고 현실을 직시하세요. 성훈이가 당신을 좋아할 리 없고 주씨 가문에서도 당신을 받아들일 리 없어요. 그러니까 미련은 이제 버리고 잔뜩 세운 꼬리도 좀 내려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아마 그런 내가 더 마음에 안 들었을까?
구소연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불쌍한 척하지 마세요. 겉으론 얌전한 척하면서 언제 성훈이 침대에 기어들어 가려고 하는지 누가 알겠어요? 분명 엄마한테 그렇게 배웠겠죠? 안 봐도 뻔하네요.”
구소연이 돌아가신 엄마를 모욕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들고 또렷하게 말했다.
“구소연 씨,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 절대 남의 관계에 끼어드는 사람 아니에요. 만약 그런 짓이라도 했다면 저희 엄마가 무덤에서라도 벌떡 일어나 절 때렸을 거예요.”
구소연은 내가 반박할 줄 몰랐던 모양인지 멍한 채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윽고 나는 조용히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엄마는 불륜 때문에 목숨을 잃으셨어요. 이미 돌아가신 분이에요. 제발 저희 엄마까지 욕하지 말아주세요.”
주성훈이 나를 도와준 이유가 뭔지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엄마가 자살했고 아저씨가 나를 맡았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굳이 엄마를 끌어들인 건, 결국 구소연이 나를 전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구소연은 금세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날 쏘아보았다.
“성질 한번 더럽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구소연의 말을 나는 들었지만 고개를 푹 숙였다.
얼마 후, 결국 나는 먼저 사과를 하려고 마음 먹었다.
“죄송합니다.”
내 자존심이야 어찌 되든, 적어도 주성훈의 얼굴을 생각하면 그녀와 싸울 순 없었다.
구소연이 엄마 얘기만 꺼내지 않으면,나는 뭐든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한참 노려보다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다시 말하지만 성훈이 건드리지 마세요.”
나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네. 건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나 구소연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불쾌함이 전혀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때, 밖에서 도우미가 문 앞에 와 공손히 말했다.
“아가씨, 강민지 양이 찾아왔습니다.”
강민지?
나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구소연은 나를 흘긋 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는 사이인 것 같네요? 그럼 같이 나가 볼까요?”
그리고 도우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안으로 모셔 와요.”
그녀의 미소는 마치 독을 품은 뱀처럼 음흉하고 교활했다.
안 좋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오르자 나는 몸이 본능적으로 떨렸다.
강민지가 여기 온 건 아마 내가 구조된 사실을 알아차렸고 또 주성훈이 여러 번 나를 도운 걸 알고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나는 도저히 강민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구소연은 나에게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손은 못 쓰게 됐어도 다리는 멀쩡한데... 제가 업어드려야 하나요?”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구소연 씨, 저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요.”
“그럼 제가 사람 불러서 업고 나오라고 해야겠네요.”
그 말은 나에게 강민지를 만나러 가라고 억지로 떠미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어차피 주성훈 집이고 그녀는 주성훈의 약혼녀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얼마 있다 구소연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강민지는 구소연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연 씨,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원래는 좀 더 일찍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집안 사정이 좀 있어서요. 부디 이해해 주세요.”
평소 내 앞에서 거만했던 모습과 달리 지금 그녀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아부하고 있었다.
곧 구소연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녀의 말투 또한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러나 얼마 전만 해도 나를 온갖 트집 잡던 사람이 분명했다.
‘정말 똑 닮았네. 두 사람.’
다만 구소연이 만약 강민지가 주성훈을 탐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과연 지금처럼 큰집 딸 행세를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편, 강민지는 만나는 사람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교활한 인물이다.
구소연 앞에서 보여준 그녀의 겸손하고 순종적인 모습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얼마 후, 강민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제가 여기 온 건, 소연 씨한테 부탁드릴 일이 두 가지 있어서예요.”
구소연은 느긋하게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말해 봐요.”
그러자 강민지의 시선이 나를 향하더니 악의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저 석진 오빠랑 결혼해요. 날짜는 다음 달 8일로 잡았고요. 그때 소연 씨께서 화림에 계시면 꼭 참석해 주세요.”
나는 멍해졌다.
다음 달 8일이라니? 지금으로부터 딱 보름 남짓한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이제 막 장례를 치른 참이었다.
내 마음속엔 복잡하고 거센 증오가 밀려왔다.
강민지는 일부러 그러는 거다.
우리 엄마가 죽어서도 편히 쉴 수 없도록 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소석진은 내 앞길을 막고 정신병원 입원증명서를 내줬고 강민지의 괴롭힘을 묵인하며 내 가족마저 외면한 사람이다.
그가 내 엄마를 기억할 리 만무했다.
정말 내 인생이 비참하다고 느낀 나는 이를 꽉 깨물었지만 이내 차분해졌다.
내 분노가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강민지는 나를 향해 도발하듯 웃고 있었다.
마치 승리를 과시하는 것처럼.
나는 분노로 혀를 깨물어 피가 날 것 같았지만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
곧 구소연이 말했다.
“시간 나면 가 볼게요.”
그녀가 그렇게 체면을 세워 주자 강민지는 너무 기뻐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소연 씨도 아시다시피 은진이는 석진 오빠 딸이고 정신질환이 있어서 제가 데려가야 해요. 소연 씨와 대표님께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요.”
역시 강민지는 나를 데려가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였다.
하지만 구소연은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을 띠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나에게 물었다.
“당신... 정신병 있어요?”
나는 구소연이 날 모욕하려는 걸 알기에 입을 꾹 닫았다.
그때, 옆에서 강민지가 얼른 대답했다.
“네. 평소엔 괜찮은데 가끔 발작할 때는 너무 무서워요.”
그 말에 구소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래요?”
“네. 그래서 얼른 정신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해야 해요.”
내 마음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또다시 잡혀가면 전에 겪었던 것처럼 밟히고 괴롭힘당하다 끝내는 어둠과 고통 속에 갇혀 있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놔둘 이유가 없겠네요. 병세가 더 악화되면 안 되니까.”
강민지는 아까보다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소연 씨. 정말 너그러우시네요.”
강민지의 아부에 구소연은 만족한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신나게 웃으며 그대로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