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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장례식

나는 황급히 제도에서 화림으로 내려와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지만 나를 마중 나온 차는 없었다. 혼자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입구 앞에 떡하니 아버지와 젊은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손님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집안의 여주인인 양 당당하게. 그 여자의 얼굴은 죽어서도 잊을 수 없다. 이름은 강민지, 내가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나를 보자 강민지의 손은 아버지의 팔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떨어졌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행동했다. 곧 아버지도 나를 발견하고는 강민지의 손등을 가볍게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내 앞까지 걸어왔다. “왔어? 먼저 가서 엄마한테 향부터 피워.” 그의 말은 담담했다. 강민지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은진아.” 나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들 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의 유골은 소박한 나무함에 담겨 있었다. 작고 정갈한 그 상자 앞엔 과일과 향, 종이돈이 가득 놓여 있었고 장례식장 안은 하얀 국화와 만장으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투신자살로 목숨을 잃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기에 유족들은 곧바로 화장을 선택했다고 했다. 나는 영정 사진 속,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젊은 시절 어머니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절을 세 번 올렸다. 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따라온 강민지는 내 옆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더니 손수건을 꺼내 내 눈가를 닦아주려 했다. “울지 마. 네가 울면 이모도 하늘에서 슬퍼하실 거야.”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그 동작이 거슬렸던 걸까, 아버지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날 꾸짖었다. “소은진, 너는 도대체 언제 철들 거야? 엄마 죽어서까지 망신 줄 거야?” 나는 유골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결혼한 사람이 딸의 고등학교 친구랑 바람피운 건 창피하지 않고? 왜 내가 부끄러워해야 해?” 그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그대로 내 뺨을 후려쳤다. 힘을 꽉 실은 손바닥이 얼굴에 닿자 나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고 볼에서는 뜨겁고 얼얼한 통증이 확 퍼졌다. 아버지가 나한테 발길질까지 하려던 찰나, 강민지가 급히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았다. “사람들 다 보고 있어요. 너무 화내지 마세요. 손님들부터 챙기세요. 은진이는 제가 달래볼게요.” 강민지의 말은 다정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너무나도 다정하게. ‘엄마는 아직 피눈물 흘리면서 보고 있을 텐데.’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더니 결국 발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가 떠나자 강민지는 다시 내 옆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은진아, 나 많이 미워하지?”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그러자 강민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너 미워.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천천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씩 내뱉었다. “사실 난 4년 전부터 너희 엄마가 죽길 바랐어. 이제야 정말 죽어버려서 얼마나 기뻤는지... 너는 모를 거야.” “너 벌 받을 거야.” 나는 이를 악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나는 강민지와 짝이 되었다. 그녀는 시골에서 전학 온 학생이었지만 흔한 위축이나 열등감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온화하고 대범했으며 예쁜ㅡ데다가 공부도 잘했다. 강민지는 친구들 사이에서 금세 인기를 끌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주말마다 그녀를 우리 집에 데려갔다. 그녀는 우리 집의 또 다른 ‘딸’이 되었고 내가 입는 옷, 먹는 음식, 심지어 학비까지 엄마는 강민지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리고 엄마는 종종 말하곤 했다. “민지는 정말 속 깊은 아이야. 꼭 내 친딸 같아. 참 든든해.” 하지만 고3 여름방학, 강민지는 아버지와 잠자리를 가졌다. 그녀는 아버지의 돈을 탐했고 들키고 나서도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엄마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아버지에게 엄마의 험담을 쏟아냈다. 그 일 이후, 엄마와 아버지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고 나는 대학에 합격해 제도로 떠났다. 그 4년 동안, 엄마는 매일 밤 눈물로 베개를 적셨고 아버지와 강민지는 함께 손을 잡고 다녔다. 나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고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곧 강민지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표정은 독에 물든 양귀비처럼 탐욕스럽고 잔혹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걸? 네 아빠가 얼마나 날 아끼는데... 그것도 몰라?” 그러더니 강민지는 손을 배 위에 얹고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나 임신했거든. 네 아빠 아이.” 나는 숨이 턱 막혔고 저도 모르게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엄마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가 강민지의 임신 소식을 알았기 때문일까? 이내 강민지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남자아이라더라. 너희 아빠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집안 재산은 다 우리 애한테 물려줄 거라며 입이 귀에 걸렸어.” 나는 말없이 강민지를 노려보았다. “넌 원래 세상 돌아가는 거에 관심 없잖아? 그래서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던 거지.” “몇 년 전, 홍콩에 있는 재벌이 나이 들어서 불륜녀한테 지분 60%를 줬다는 기사 봤어. 원래 부인과 아들은 20%밖에 못 받고 딸은 아예 거지가 됐지. 그 재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불륜녀가 본인을 제일 잘 챙겨준다면서 칭찬했어. 하긴, 40살 차인데도 착한 척하는 이유가 뭐겠어? 당연히 돈 때문이지.” “나도 그 방식 그대로 썼어. 네 아빠 말은 고분고분 다 듣고 순종했지. 그러니 결국 이렇게 됐잖아.” 흐뭇하다는 듯 미소를 짓는 강민지의 표정을 본 나는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차라리 그녀를 엄마 영정 시진 앞에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강민지는 영악했고 치밀했다. 한 번 소란이 나면 내가 손해 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말했다. “오늘은 엄마의 장례식이야. 여기서 널 상대할 마음 없어. 앞으로 두고 보자.” 강민지는 비웃듯 대답했다. “근데 나는 말이야... 널 가만두고 싶지가 않아.” “내가 일부러 넘어진 다음 네가 날 밀었다고 하면 어쩔 거야? 네가 나를 미워해서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없애버리려고 했다고 네 아빠한테 말하면... 집에서 쫓겨나는 거 한순간이겠지?” 강민지의 음흉한 미소를 본 나는 잔뜩 경계했다. 사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교묘한 수작으로 엄마를 악녀로 만들었고 아버지의 마음을 훔쳤다. 곧 강민지가 몸을 일으키며 진짜로 ‘넘어질 준비’를 하려는 순간 누군가 다가왔다. 그러자 강민지의 얼굴이 돌변했다. 방금 전의 사악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공손하고 단정한 얼굴로 말했다. “주 대표님, 오셨어요?” 나도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붉은 열매가 어우러진 안개꽃 꽃다발을 들고 천천히 어머니의 영정 사진 앞으로 걸어왔다. 그 꽃은 이 장례식장의 어떤 조화보다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꽃은 어머니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꽃이었다. 나는 조용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이름은 주성훈. 누구나 화림에서 이 이름을 듣는다면 무서워서 벌벌 떨기 나름이다. ‘엄마가 저 꽃을 좋아하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조용히 남자를 바라보다 확신했다. 그는 화림 상권을 뒤흔든 인물이었다. 2년 전 이 도시에 나타나자마자 몇몇 상장회사를 단숨에 인수했고 그의 등장은 모든 사업가들을 긴장시켰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 나는 막 대학에 합격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나의 합격을 핑계 삼아 자리를 마련하며 그와 인연을 맺었다. 주성훈은 사람을 쉽게 들이지 않는 분위기를 잔뜩 풍겼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그 자리에 선 순간, 단연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키가 큰 데다가 어깨도 넓고 이목구비는 또렷하며 무엇보다 카리스마가 있었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비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진 남자. 주성훈이 왜 이 도시에 내려온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돈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했다. 강민지는 옆에서 주성훈을 올려다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나는 조용히 비웃었다. ‘참, 여우답네.’ 강민지, 그녀는 확실히 아름다웠고 남자들이 쉽게 눈길을 줄 만한 외모였다. 어쩌면 주성훈도 그녀의 유혹에 넘어갈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 주성훈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강민지를 쳐다보며 짓고 있던 표정을 미처 거두지 못한 채로 우리의 시선은 제대로 마주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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