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아저씨
이런 때 하는 괜한 해명은 서로를 더 민망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실제로 나는 올해 스물두 살, 주성훈은 나보다 겨우 여섯 살 많을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늘 주성훈을 형처럼 여겼기에 나도 자연스레 그렇게 불렀다.
주성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내 인사를 받았다.
그는 곧장 강민지를 향해 말했다.
“은진이랑 할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자 강민지는 불만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대답했다.
“은진이는 아직 어려서요. 혹시 은진이 아버지를 부르면...”
그녀가 머뭇거리자 주성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옆에 대기하던 보디가드가 조용히 앞으로 나와 강민지를 막아섰다.
강민지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어쩌지 못하고 속이 상한 채로 물러났다.
주성훈은 내 어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 세 개의 향을 피운 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
그는 긴 다리를 뻗으며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아직 다리에 남아있는 저릿함과 뺨의 통증을 참고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주성훈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SUV, 번호판은 제도의 것이었다.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자 차 안엔 주성훈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은은한 재스민 향기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얌전히 앉아 주성훈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곧 그의 시선은 내 한쪽 뺨에 머무르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주성훈 앞에서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고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싫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친구라는 사람이 그랬어?”
물론, 강민지를 말하는 거였다.
아버지와 강민지의 관계는 이미 화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들 안다.
내가 그런 사람을 집에 데려온 순간부터 어머니를 파멸시켰다는걸.
나는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복수할 거예요.”
주성훈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후, 그는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유언장이야. 네 어머니가 너한테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어.”
나는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주성훈을 올려다보았다.
‘엄마랑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는데 왜 이런 중요한 걸 아저씨에게 맡긴 걸까?’
게다가 주성훈이 엄마가 좋아하던 꽃을 알고 있었다는 점까지 떠오르자 온갖 의심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망설이며 문서를 받지 않자 그의 눈빛이 살짝 차가워졌다.
그래서 나는 급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펼쳐보니 엄마는 전 재산을 나에게 남긴다고 적어두었다.
하지만 엄마의 사유 재산은 많지 않았다.
회사의 지분은 이미 아버지에게 빼앗겼고 엄마는 평소에도 개인 돈을 따로 모으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 남은 부동산을 처분한 돈을 다 합쳐도 40억, 수도로 치면 외곽에 겨우 집 한 채 살 정도였다.
나는 괴로움에 숨이 막혔다.
돈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엄마가 이토록 헌신했는데 남은 게 이것뿐이라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당시 아버지는 시골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었다.
외할아버지 집안은 화림의 굴지의 재벌이었고 엄마는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사랑해 결혼했다.
외할아버지는 화병으로 쓰러지셨지만 외동딸을 위해 결국 회사를 엄마에게 물려줬다.
그런데 아버지는 엄마의 믿음과 사랑을 이용해 회사 명의를 바꾸더니 조금씩 지분까지 손에 넣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너무 어렸기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줄도 몰랐다.
그 모든 걸 알았더라면 내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외할아버지가 쌓아 올린 수백억의 자산은 모두 아버지 손으로 넘어갔고 엄마에겐 40억만이 남았다.
외할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그리고 이 사실을 안다면 아마 다시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너무나도 안타깝고 비극이었다.
나는 대학 진학을 통해 제도로 떠나려 했고 엄마도 함께 나가자고 했었다.
그러나 엄마는 끝내 아버지를 지키겠다고 이곳에 남았다.
엄마는 가엾은가?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짓밟히고 마지막은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어머니는 지옥에서도 불쌍함을 인정받을 만큼 가엾은 사람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딸보단 남편을 택한 엄마는 밉기도 했다.
‘내가 엄마 탓할 자격은 없지.’
이 모든 비극은 결국 내가 강민지를 집에 데려온 순간부터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줄줄 흘렀다.
그러자 주성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너희 어머니를 한 번 만났어. 유언장 외에,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고.”
나는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 그의 얼굴마저 흐릿했다.
“너한테 제도로 올라가 새 삶을 살라고 하셨어. 복수 같은 거 하지 말고 미움에 눈멀지 말라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왜... 왜 나한테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 왜 나를 두고 떠났을까?’
나는 유언장을 손에 쥐고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하던 주성훈은 조용히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 어머니 말 들어. 제도로 가서 돌아오지 마.”
나는 참을 수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저 잊을 수 있다면 이토록 아프지도 않을 텐데.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고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 후, 내가 울음을 멈추자 주성훈은 차에 기대앉아 담배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진 않았다.
그저 손에 쥔 채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게 괜히 민망했다.
주성훈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담배를 다시 재떨이에 던져넣었다.
“내려. 너희 어머니 장례 끝나면 제도로 돌아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고맙다고 말하지도 않고 그저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그는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내가 내리려는 순간, 그는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 내 번호 있어.”
검정 바탕에 금박으로 이름과 연락처만 새겨진 명함이었다.
“너희 어머니에게 진 빚이 있어. 네가 원하면 언제든 갚을게.”
‘아, 그래서 유언장을 전달해 줬고 유언도 대신 전해준 거였구나.’
나는 또 한 번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그와 다시 마주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린 뒤, 주성훈의 운전기사와 보디가드는 조용히 차로 돌아갔고 문이 닫히자마자 차는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손에 든 명함을 내려다보다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조문객들은 이미 모두 돌아갔다.
외가 쪽도 남은 가족이 거의 없었고 엄마는 생전에 친구가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텅 빈 빈소 앞에 나 혼자 남아 있었다.
그때, 강민지가 다가와 내 손에 든 유언장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주 대표님이 주신 거야?”
그 말에 아버지가 갑자기 다가와 말했다.
“나도 좀 보자.”
아버지는 말이 끝내기 무섭게 내 손에서 유언장을 빼앗았다.
강민지는 목을 쭉 빼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곧장 감탄하듯 말했다.
“와, 은진이 부자네. 40억? 난 꿈도 못 꿔.”
강민지는 이미 아버지에게서 몇 채의 집을 넘겨받았으면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이번엔 이 돈도 가져가려는 건가?’
나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봤지만 그는 내 시선을 피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진아, 너 아직 어리잖아. 이 돈은 아빠가 대신 관리해 줄게.”
‘그래. 이 돈마저도 탐나는 거겠지.’
나는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강민지는 나랑 동갑이야. 벌써 4년째 아빠의 애인이 됐고 이제는 애까지 가졌잖아. 그런데 난 아직 어려?”
내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너 이게 무슨 말버릇이냐! 못된 년! 너 때문에 네 엄마가 그렇게 된 거야! 난 너를 낳은 걸 후회해!”
그러자 강민지가 다급히 팔짱을 끼며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오빠, 진정하세요.”
내 아버지 이름은 소석진, 엄마는 차일화, 그리고 내 이름은 소은진이다.
소은진, 얼마나 깊은 뜻이 담긴 이름인가.
엄마는 이 이름 하나에 평생을 감동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게 연극이었다.
엄마는 끝내 소석진이라는 남자의 본모습조차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