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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엄마가 자살했다고 생각해?

약간 긴장한 나는 몸을 곧게 폈다. 그런 나를 힐끗 본 주성훈은 시선을 돌리더니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 그 외에 아무 반응이 없자 나는 약간 실망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잘생긴 얼굴, 출중한 외모, 집안도 최고인 주성훈은 어떤 여자든 마음만 먹으면 곁에 둘 수 있었다. 구소연만 해도 왕을 홀릴 만한 미모에 화려한 광채를 뿜어내는 미인 중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주성훈은 구소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구소연에 비하면 나는 한참 모자란데 어떻게 나 같은 외모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며 가져서는 안 될 마음과 비현실적인 환상을 모두 접어두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았다. 다시 주성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그는 키까지 커서 정말 우아해 보였다. 그런 주성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그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나와 주성훈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주성훈은 하늘에서 내려준 신이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아무리 환생한다고 해도 주성훈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차에 탄 후 나와 주성훈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주성훈의 몸에서 은은한 박하 향기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순수한 박하 향이 나는 남성 향수는 기억나지 않았다. 상쾌하고 좋은 냄새인 것을 보니 아마 바디워시 향일 것이다. 소씨 저택으로 향하는 차 안, 계속 서류를 보고 있는 주성훈은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했지만 도중에 비가 억수로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화창한 날씨였는데... 아마 여름이 되어 비가 잦아진 모양이었다. 빗길 때문에 운전기사가 운전을 천천히 하다 보니 3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한 시간이나 달렸다. 소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결혼식 장소는 별장 뒤쪽의 운동장에 마련되어 있었다. 원래는 예전에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만든 놀이터였는데 소석진이 운동장으로 개조했고 이제는 온 저택이 소석진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도착해 있었고 장식도 화려한 것이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주성훈이 갑자기 말했다. “내 팔 잡아.” 순간 멍해진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말에 따랐다. 이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어 다시 팔을 뺄 수도 없었다. 소석진과 강민지가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보였다. 배가 이미 약간 불러온 강민지는 매우 밝게 웃고 있었다. 소석진과 드디어 결혼해 골인해 소씨 저택의 여주인이 될 터이니 기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 엄마가 있던 이 집이었는데 이제는 강민지가 엄마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바로 그때 강민지가 우리를 쳐다보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에 웃음이 바로 사라진 강민지는 악의에 찬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러운 표정으로 소석진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뒤를 돌아본 소석진은 주성훈을 보고 급히 다가오더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주 대표님, 여기까지 와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주성훈이 그들을 경찰서에 가두고 나를 정신병원에서 구해준 일이 있었는데도 소석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고 심지어 아첨하는 미소까지 지었다. 이런 뻔뻔함에 나는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소석진을 쳐다봤다. 주성훈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석진은 주성훈의 싸늘한 태도에 어색하게 웃더니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은진아, 넌 주 대표와 함께 오는 거였으면 미리 전화 한 통이라도 하지 그랬니?” 나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난 정신병자라서 전화 못 해.” 표정이 굳어진 소식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얘가 말하는 것 좀 봐, 정말 예의도 없이.” 그러고는 주성훈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주 대표님, 은진이에게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잘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나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이런 사람이 아버지라고?’ 그때 주성훈이 말했다. “은진이는 괜찮아요.” 그러면서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순간 놀랐다. 소석진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임을 깨달은 나는 이내 주성훈이 내 편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임을 알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따뜻함에 나는 고맙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리니 강민지가 질투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주성훈이 나에게 잘해주는 걸 못 본 척하면서 몸을 비틀어 소석진의 팔을 잡고는 주성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연 씨도 왔는데 인사하러 안 갈래요?” 강민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소연이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성훈 앞에 멈춰선 구소연은 부드럽게 말했다. “성훈 씨, 오랜만이야.” 하지만 주성훈은 구소연을 보지도 않은 채 나를 향해 말했다. “바람이 차네? 너 옷 얇게 입어 감기 걸리겠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걸어가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주성훈은 나를 방패 삼아 구소연을 불편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마 지금 구소연은 마음속으로 나를 저주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상황이라 나는 주성훈의 말을 반박할 수도 없어 그의 걸음에 맞춰 고개를 숙이며 따라갔다. 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구소연이 따라오더니 주성훈의 다른 팔을 잡으며 응석을 부렸다. “성훈 씨, 소은진과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알아. 성훈 씨 같은 사람이 저런 애송이를 좋아할 리 없잖아. 나에게 화가 나서 그런 거지, 그렇지?” 그제야 비로소 구소연을 바라본 주성훈은 천천히 한마디 했다. “아니.” 다시 걸음을 옮기자 구소연은 이내 뒤처지고 말았다. 주성훈의 팔을 잡고 있는 나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걸은 후 슬쩍 뒤를 돌아보니 구소연이 어두운 얼굴로 나와 주성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성훈이 온 것을 알고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억지로 점잖은 미소를 유지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더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한참 생각한 끝에 결국 주성훈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성훈 씨,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 주성훈이 나를 보지 않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급히 홀을 떠났다. 화장실은 운동장 뒤에 있었다. 이 집에서 20년 넘게 살았기에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는 길, 집안의 모든 인테리어가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마는 진한 빨강, 나는 보라색을 좋아했기에 예전에는 집안이 화려한 색상으로 가득했었다. 비록 촌스럽긴 해도 정겹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제 모든 스타일이 연한 색상을 좋아하는 강민지의 취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와 엄마의 물건들은 이미 다 버려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더욱 우울해진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찬물로 얼굴을 적시며 마음속의 괴로움과 울적함을 감추려 했다.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은 후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강민지가 들어왔다. 강민지는 경호원더러 문을 지키게 한 뒤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왜? 나한테 손을 대려고? 잊지 마, 난 성훈 씨의 여자야. 나에게 손찌검을 하면 주성훈 씨가 대신 복수할 거야.” 강민지도 그 점을 떠올렸는지 나를 가리키며 욕을 했다. “쓰레기 같은 년!” 나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욕할수록 난 더 기분이 좋아지네.” 강민지가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모습에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봐, 내 손 거의 다 나았어. 하지만 네 손은 아마 영영 못 쓰게 되겠지?” 들어올 때부터 나는 강민지가 장갑을 낀 것을 눈치챘다. 아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표정이 일그러진 강민지는 몇 초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흉측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젠간 너를 죽여버릴 거야. 네 엄마처럼.” 나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우리 엄마, 설마 네가 죽인 거야?!” 강민지가 비웃듯이 말했다. “네 엄마가 자살했다고 생각해? 정말 순진하네.” 설마 엄마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거라고? 나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강민지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누군가의 손을 빌렸을 뿐이야. 네 엄마를 진짜 죽인 건 다른 사람이지... 주성훈이 왜 너한테 그렇게 잘해주는지 알아? 너에게 죄책감이 있어서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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