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감사의 대가
심씨 가문의 장남 이름은 심우진이다. 양 선생님의 학생으로 양 선생님은 심우진에 대해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특히 수술칼을 잡는 손이 매우 안정적이며 가르친 학생 중에서 재능이 가장 뛰어나고 영민하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심우진이 법의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에 양 선생님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심우진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양 선생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내 룸메이트 고민아 때문이었다.
고민아는 자기 아빠가 그녀를 심씨 가문의 가주에게 첩으로 바치려 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심씨 가문의 가주는 심우진의 아버지였기에 당시 심우진이 나서서 고민아를 도왔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심우진은 꽤나 착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분, 지금 무슨 일 있나요?”
신도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하지만 분명 뭔가 신경 쓰는 듯했다.
설마 소석진과 관련이 있는 걸까?
소석진은 당시 심씨 가문의 힘을 빌려 학교에 압력을 넣어 내 퇴학을 재빨리 처리하게 했다.
주성훈을 바라보았지만 평소와 같은 차분한 표정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성훈은 원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의심이 들기 시작했지만 신도윤이 금방 화제를 돌렸다. 화림의 특색에 대해 물어본 것이다.
화림은 남방 도시라 풍습과 습관이 제도와는 많이 달랐다. 특히 음식 문화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신도윤이 흥미로운 얼굴로 화림의 간식들에 대해 묻자 나는 몇 가지를 골라 설명했다.
식사 후 신도윤이 즐길 거리를 찾자며 나를 빤히 보면서 말했다.
“은진 씨, 화림에서 컸으니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 알죠? 오늘은 나 데리고 구경 좀 시켜줘요.”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종종 나를 데리고 여행을 다녔지만 접대 자리에는 데려가지 않았다. 소석진은 더더욱 나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기에 화림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 몇 군데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남자들이 좋아하는 곳을 알 턱이 없었다.
신도윤은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은진 씨가 모범생이었나 보네요.”
그러고는 주성훈에게 눈짓을 했다.
이때 이정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제도로 돌아가야 하니 집에 조용히 있어.”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주성훈을 바라보았다.
내일 제도로 돌아간다고?
무슨 일이 생겼기에 그렇게 급히 돌아가야 하는 걸까?
하지만 감히 더 묻지 못했다.
신도윤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형, 평소에도 그렇게 점잖은 척이야? 본인이 놀지 않는다고 나까지 못 놀게 하면 안 되지. 나 항의할 거야.”
이정환이 담담한 얼굴로 신도윤을 흘겨보았다.
“한마디 더 하면 군대에 처넣을 거야.”
신도윤은 즉시 두 손을 들었다.
“잘못했어! 형! 자비를 베풀어 줘! 편히 살게만 해줘.”
방금까지 나를 놀릴 때는 공작새처럼 우쭐대던 신도윤이 이정환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모습이 너무 해괴망측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주성훈이 갑자기 나를 보며 말했다.
“서재에서 기다려.”
급히 웃음을 거둔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서려 했다.
그러자 신도윤이 중얼거렸다.
“가지 마요. 은진 씨. 놀러는 못 가더라도 같이 얘기라도...”
주성훈이 평온한 얼굴로 이정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도윤이 형을 군대에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신도윤이 즉시 소리쳤다.
“성훈아, 너 이 나쁜 놈!”
나는 이미 서재로 향하고 있었지만 신도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 사이가 정말 재미있는 것 같았다.
눈빛만으로도 서로 통하는 듯 묘한 친화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니까.
...
2분 후 서재에 들어온 주성훈은 내가 계속 서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앉아.”
내가 자리에 앉자 주성훈이 책상에 기대어 서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경민이 준 영상 봤지.”
고개를 끄덕이자 주성훈이 말을 이었다.
“소석진과 강민지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 봤어?”
잠시 침묵한 나는 주성훈과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성훈 씨, 나를 도와준 것은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여자친구 역할은 정말... 못 하겠어요. 나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의 심오한 마음처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주성훈의 모습에 나는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다.
“나는... 이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주성훈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나간다고?”
황급히 주성훈을 쳐다본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정말 도움 많이 받았어요... 이제는 소석진과 강민지가 저를 괴롭힐 여유도 없을 테니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주성훈이 말했다.
“잊지 마. 넌 아직 정신병자야.”
그 한 마디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이었다. 소석진은 아직도 내 정신병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정신을 차린 뒤 다시 나를 정신병원에 넣으려 한다면 나는 정말 방법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주성훈도 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났지만 결국 한마디 했다.
“주성훈 씨, 내가 왜 여자친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정말 겁이 많아요...”
주성훈이 내 말을 끊으며 담담히 말했다.
“내가 된다고 하면 되는 거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 정말 무서워요. 구소연이 나를 괴롭히면 어떻게 하죠?”
주성훈의 눈빛이 내 얼굴을 스쳤다.
“오늘 구소연이 무슨 말 했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주성훈의 표정에 몇 초간 생각한 후 말했다.
“네, 3일 안에 성훈 씨 곁에서 떠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어요... 정말 무서워요...”
주성훈이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깜짝 놀란 나는 주성훈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사실 주성훈은 이미 내 속마음을 읽고 있었다.
나는 원래 겁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구소연만 상대한다면 어느 정도 버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신도윤이 말했듯이 주성훈은 나를 위해 구씨 가문과 대립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지금 제도의 상류 사회에서는 주성훈이 화림의 한 여자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성훈이 원하는 효과였다.
하지만 나에게 이 모든 것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구소연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구씨 가문, 더 나아가 제도의 모든 재벌가 여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정말 그럴 능력과 용기가 없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두 가지 비밀이 있었다.
첫째, 어머니의 죽음이 주성훈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둘째, 내가 주성훈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점.
어쨌든 주성훈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고 이 두 가지 비밀 또한 주성훈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주성훈이 갑자기 내 쪽으로 다가오자 그의 몸에서 나는 박하 향기가 코를 스쳤다.
내가 긴장한 얼굴로 몸을 움츠리자 주성훈은 몸을 살짝 굽히며 내 얼굴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남자 향기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주성훈이 손으로 내 턱을 잡아 올리자 어쩔 수 없이 그의 눈을 마주해야 했다.
주성훈이 나를 응시하며 천천히 웃었다.
“아쉽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야. 넌 내 여자친구가 될 수밖에 없어.”
깜짝 놀란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성훈은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검지로 내 턱을 간질였다.
“아, 참. 생각해보니 오늘 내가 널 도와줬지? 그럼 감사의 대가를 받아야지.”
나는 더욱 당황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때 주성훈은 내 턱을 들어 올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