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윤재야, 대체 왜...?”
백아린은 비수가 꽂힌 가슴을 움켜쥐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눈앞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동안 여동생의 추격을 전부 피해왔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믿고 사랑했던 남자에게 뒤통수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자는 피 묻은 손가락을 우아하게 닦고 있었다.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문밖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냐하면 윤재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고개를 들자 백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스킨 톤의 하이힐을 신고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연핑크 오프숄더 드레스는 그녀의 뽀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고급스러우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단아한 얼굴과 악랄한 미소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백아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백시연이 여긴 웬일이지?
이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도윤재를 바라보았다.
“설마... 날 죽이려고 백시연과 손을 잡은 거야?”
“그래, 무려 15년 동안이나 참아줬으면 됐지. 다행히 오늘부로 모든 게 끝났어.”
도윤재는 피 묻은 손수건을 버리고는 백시연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백시연이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자기야, 수고했어.”
백아린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이 굳어버렸고, 가슴을 움켜쥔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15년을 참았다니... 도윤재,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우린 7살부터 함께 자라 초, 중, 고, 그리고 대학교까지 무려 15년을 함께한 소꿉친구잖아. 날 꼭 책임지겠다며 실망하게 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맹세도 했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
어느덧 목이 갈라졌고, 쉰 목소리로 절규하듯 말했다.
도윤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키스에만 몰두했다.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를 무렵에야 비로소 백시연을 놓아주고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하... 순진하긴. 평소에 거울도 안 보냐? 꼴이 촌스러우면 머리라도 좋아야 할 텐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랑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애초에 너한테 접근한 이유가 학업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서였어.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문제아로 만들어서 가문을 잇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내 진짜 목적이었지. 그래서 일부러 신분까지 조작해 가며 네 소꿉친구 행세를 한 거야. 그동안 좋아하는 척하느라 얼마나 징그러웠는지 모르지?”
매정한 말에 백아린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온몸이 얼어붙었다.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에 숨이 막혀왔다.
어릴 때부터 도윤재만 바라보며 그를 우상으로 삼았다. 심지어 대학 입시도 포기하고 음대의 초청도 거절했으며 최고의 명문가에 입성할 기회마저 스스로 뿌리쳤다.
더욱이 저속한 인터넷 방송을 하며 열심히 돈을 벌어 대학 등록금까지 대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그가 의도한 치밀한 계획일 줄이야.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남자가 그녀를 죽도록 미워하고 증오했다는 사실이 당최 믿기지 않았다.
그토록 경계하고 조심했건만 결국 가장 믿었던 사람의 손에 무너지고 말았다.
“하하하!”
백아린은 문득 고개를 젖히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히스테릭한 웃음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뭐가 웃겨? 우리가 잔인한 게 아니라 이게 다 언니를 편애하는 할아버지 탓이야.”
백시연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백아린을 밀치더니 도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우리 엄마는 어릴 적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웠어. 언니가 태어났을 때 사고를 꾸며 엄마를 잃게 하고, 거기다 ‘불운의 아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였는데도 할아버지는 언니한테 회사 지분의 절반을 나눠주려 하잖아. 정작 난 회사 일도 열심히 하고 할아버지께 효도해도 늘 의심받는 처지였어. 게다가 입버릇처럼 동생인 나한테 양보하라고만 하셨어. 시골 촌뜨기 주제에 감히 경쟁 상대를 자처하다니? 백씨 가문의 후계자는 바로 나야!”
백아린은 쓰러지는 바람에 칼날이 살갗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느덧 바닥에 선혈이 낭자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알고 보니 그녀가 어머니를 죽인 게 아니라 이복 여동생과 계모에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재수탱이라는 둥, 부모를 해친 불길한 존재라는 둥 갖은 누명을 쓰고 평생을 살아왔다.
하늘에 사무치는 증오가 솟구쳐 오르며, 피로 붉게 물든 눈으로 두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백시연! 도윤재! 너희 같은 악랄한 것들은 인간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어. 내가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럼 얼른 귀신이 되어보시지? 우린 오늘만 기다려 왔거든.”
백시연의 눈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내 탁자 위의 꽃병을 집어 백아린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꽃병이 산산이 조각났다.
백아린의 머리가 찢어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선혈이 흥건한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극심한 고통에 끝내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