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11화

한참이 지난 후 성수혁이 정신을 차리고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국 다 만들면 회사로 보내줘. 기사님한테 얘기하면 돼.” ‘점심에 먹으려고? 해주지, 뭐.’ 정해은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다정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나중에 약선 요리도 연구해볼게요. 수혁 씨 힘들게 일하는데 몸보신해야죠.” 성수혁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고해줘, 그럼.” 안정숙은 구석에 숨어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다시 예전처럼 화목하게 지내는 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그녀였다. 오후 3시 30분. 검은 정장을 입은 성수혁이 정해은의 손을 잡고 레드카펫을 밟으며 천천히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부부가 등장하자마자 기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고 일사불란하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빨리, 빨리 찍어요. 성씨 가문의 부부가 왔어요.” “두 분 모두 인물이 훤해서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요.” “어? 그런데 성수혁 대표가 인기 여배우 백유라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하던데요?” “쉿. 죽고 싶어서 그래요? 파파라치도 아니면서. 그런 소리 오늘 절대 함부로 하지 말아요. 성 대표님 귀에 들어갔다간 밥줄이 끊기는 수가 있어요.” 정해은과 성수혁이 입장하자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아 참, 서씨 가문의 후계자는 안 왔어요? 왜 서태영이 왔죠?” “그 소식 못 들었어요? 서씨 가문의 후계자랑 회장님의 사이가 안 좋잖아요. 18살 때 일부러 어머니 성으로 바꾸고 집안과 연을 끊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유일한 후계자잖아요. 서태영은 회장님의 의붓아들이라 피도 섞이지 않았는데 그 큰 서진 그룹을 서태영한테 줄 리가 있겠어요?” “서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경성시에서 손꼽히는 재벌이에요. 재벌가에는 항상 시비가 많은 법이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냥 가만히 구경만 하면 돼요.” 블루 롱드레스를 입은 정해은이 지나가는 곳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한 재벌 집 아가씨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서씨 가문 사모님 상상 이상으로 예뻐요. TV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신데요?” 옆에 있던 또 다른 재벌 집 아가씨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사모님은 카메라가 잘 안 받는 타입인가 봐요. 인터넷에 도는 사진들도 충분히 예쁜데 실물을 보니까 분위기가 정말 대박인데요? 사진작가들이 사모님 미모의 십 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했네요.” 정해은의 가느다란 손목이 성수혁의 팔꿈치 안쪽에 걸쳐져 있었다. 계단이 앞에 나타나자 그는 자연스럽게 넓은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도 망설임 없이 깨끗하고 하얀 손을 뻗어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성수혁의 손바닥은 따뜻했지만 정해은의 손가락은 차갑기만 했다. 그녀의 성격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웠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추워?” 둘 사이에 백유라가 끼어든 뒤로 그는 그녀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성수혁의 눈빛에 담긴 걱정과 관심을 보자 정해은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얼굴이 잘생긴 데다가 검은 정장을 입으니 더욱 훤칠하고 멋있어 보였고 움직일 때마다 성숙한 남자의 매력을 뿜어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 속의 다혈질이고 밝았던 소년은 점점 차분하고 냉정하게 변해갔다. 무슨 일이 생겨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고 의지하고 존경할 만한 비즈니스 엘리트가 되었고 성씨 가문의 주인으로 탈바꿈했다. 정해은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이따가 안으로 들어가면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설정해줄 수 있어요?” 정해은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성수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왜?” “약속해줄 수 있는지만 대답해요.” 그녀는 성수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말투는 여전히 상냥했고 얼굴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성수혁은 그녀에게서 단호함을 느꼈다. “알았어.”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동의한 뒤 바로 그녀 앞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정해은의 시선이 그의 동작에 따라 휴대폰 화면에 머물렀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가득했는데 보나 마나 백유라의 메시지일 것이다. 성수혁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가 백유라의 메시지를 보지 않고 바로 무음으로 설정했다. 설정한 다음에는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무음이면 백유라가 아무리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내도 성수혁은 모를 것이다. 적어도 자선 파티가 끝날 때까지 백유라의 전화 한 통에, 한마디 말에 정해은을 버리고 떠날 일은 없었다. 자선 파티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다. 정해은은 성격이 조용한 편이었지만 이런 사교 자리에서는 능숙하게 대처했다. 절대 주눅 들지 않았고 실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정씨 가문도 상류층의 일원이니까. 단지 경성시에서 권력과 재력이 성씨 가문에 미치지 못할 뿐이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오래전부터 뵙고 싶었어요.” 서씨 가문의 의붓아들 서태영이 와인잔을 들고 다가오더니 예의 바르게 웃으며 인사했다. 정해은도 바로 사교용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대표님.” 서씨 가문 회장의 유일한 친아들인 서선우는 가문을 배신하고 성을 어머니의 성으로 바꿨기에 이젠 기선우라 불렸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회장은 어쩔 수 없이 서진 그룹을 잠시 의붓아들인 서태영에게 맡겼다. 재벌들의 숨겨진 비밀을 외부인이 알 리가 없었다. 서씨 가문의 내부 사연에 대해 정해은은 하나도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서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어떤 분야에서는 라이벌이었고 또 어떤 분야에서는 우호적인 파트너였다. 상계는 항상 이러했다. 이익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서태영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적을 만드는 것보다 우호적인 관계로 지내는 게 나았다. 자선 파티는 순조롭게 끝이 났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면서 공원을 지나가던 그때 정해은이 창밖 풍경을 보며 갑자기 말했다. “차 세워주세요.” “사모님, 왜 그러세요?” 운전기사가 브레이크를 밟고 고개를 돌려 묻자 정해은이 웃으며 답했다. “산책 좀 하고 싶어서요. 거의 다 왔으니까 걸어서 갈게요.” 해 질 녘인 데다가 가을이라 날씨가 좀 쌀쌀했고 공원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쓸쓸한 가을바람까지 불어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다. “같이 가, 그럼.” 성수혁이 한참 침묵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정해은은 처음에는 살짝 놀랐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와 가녀리고 예쁜 여자가 공원의 돌길을 나란히 걸었다. 저 멀리 석양이 마지막 주황빛을 발했고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정해은이 성수혁의 커다란 손을 슬쩍 잡자 그도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젊은이.”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니 한 노인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시력을 잃었는지 흐린 눈동자가 초점 없이 텅 비었고 앞에 점괘를 보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네모난 천에 알 수 없는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가자. 사기꾼이야.” 성수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정해은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