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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런데 정해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성수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해은이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점쟁이 노인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걸 믿어?”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정해은은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두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지금까지 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좀 궁금해요.” 성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번 보면 안 될까요?” 그녀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한 걸 본 성수혁은 결국 점쟁이를 돌아보며 허락했다. “마음대로 해.” 정해은이 환하게 웃으며 노인에게 쪼르르 달려가더니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점 좀 봐주세요.” 노인이 상냥하게 웃었다. “전 골상으로 점을 보거든요. 손 내밀어 보세요.” 정해은은 바로 손을 내밀었다. 뒤에 서 있던 성수혁은 기분이 불쾌했지만 흥분한 그녀를 보고는 꾹 참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해은의 성격을 잘 알았다. 항상 맑은 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해서 좀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백유라처럼 활기차고 밝은 타입과는 완전히 정반대인지라 소녀다운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기 드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냥 내버려 두자.’ 다행히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누가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서 성씨 가문의 안주인이 길거리 점쟁이를 믿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성수혁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눈먼 노인이 골상을 만져보더니 자애로운 표정으로 정해은 쪽을 ‘쳐다봤다’. “아가씨, 봄꽃이 만발할 때 진짜 인연을 만날 거예요.” 이해하기 힘든 소리에 정해은이 점쟁이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진짜 인연을 만난다니요? 어르신, 저 결혼했어요.” “해은아, 가자.” 성수혁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점쟁이를 내려다보면서 비아냥거렸다. “지금이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이런 사기꾼이 있네.” 그러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정해은을 끌고 갔다. 그가 너무 세게 잡아당긴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성수혁이 화가 난 상태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조금 전 점쟁이의 뜻은 그가 정해은의 진짜 인연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원. 우린 부부라고.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인데 내가 인연이 아니면 누가 인연이란 말이야?’ “요즘 사기꾼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앞으로는 저런 놈들을 피해 다녀.” 성수혁의 싸늘한 한마디에 정해은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난 그냥...” “정해은!” 성수혁이 어두운 얼굴로 그녀의 말을 가로채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노려봤다. “네가 누군지 잊지 마.” 그의 표정이 엄숙하기 그지없었고 두 눈에 분노가 꿈틀거렸다. “넌 성씨 가문의 안주인이야.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고.” 사나워진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정해은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가씨, 명심해요.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추워질 거예요. 긴 겨울을 버텨야만 봄이 와서 꽃이 만개할 겁니다.” “입 다물어요!” 성수혁이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이만 가요.” 정해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점쟁이 하나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이 된 바람에 공원 산책도 물 건너갔다.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빠르게 걸었다. 성수혁이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한 걸음 걸을 때면 정해은은 두 걸음을 걸어야만 따라갈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화가 난 상태라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그녀를 배려할 생각 따위 전혀 없는 듯했다. 따라가기 버거웠던 정해은은 결국 뛰다시피 해야 간신히 쫓아갔다. 그렇게 별장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정해은은 땀 범벅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도 헐떡거렸다. “사모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정해은을 본 안정숙이 화들짝 놀라더니 재빨리 다가와 부축했다. 그녀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했다. “아... 아주머니, 물... 물 좀... 주세요.” “네. 알았어요. 먼저 앉아서 쉬세요.” 안정숙은 그녀를 부축해 거실 소파에 앉힌 다음 물을 따르러 갔다. 성수혁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둔 채 위층으로 직행했다. 안정숙이 물을 가져오자 정해은은 한 번에 쭉 마셨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안정숙은 안타까워하면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등을 토닥여줬다. “사모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 이렇게 땀범벅이 되셨어요?” 안정숙은 마음이 다시 조여들었다. ‘겨우 사이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더니 왜 또 이렇게 됐지? 게다가 대표님은 참 매너도 없으셔. 사모님이 아내인 걸 떠나서 여자인데 뒤에서 힘들게 따라오는 걸 보면서도 기다려주지 않다니.’ 정해은의 예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걸 본 안정숙은 가슴이 아파 눈시울이 다 붉어졌다. “난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아주머니. 먼저 올라가서 샤워할게요.” 물을 마시고 나니 많이 진정되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가 안방 앞을 지나갈 때 발걸음을 멈췄다.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노크하려 했다. 그런데 손가락 마디가 문에서 1cm 남았을 무렵 오른손이 갑자기 멈췄다. 그렇게 팔꿈치가 공중에 뜬 채 한참을 망설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해은은 결국 다시 손을 거뒀다. 역시 아직 용기가 부족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게스트룸으로 향했다. 이 감정이 너무나 위태롭게 느껴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보니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정해은은 화장대 앞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헤어 오일을 발랐다. 동작이 아주 느렸고 눈빛도 멍한 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해은은 오늘 저녁 점쟁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봄꽃이 만발할 때 진짜 인연을 만난다고? 진짜 인연이란 게 뭐지?’ 봄꽃이 만발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쉬웠다. 그건 봄을 뜻했다. 정해은은 서랍을 열고 가장 안쪽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성수혁이 이미 사인한 이혼 합의서였다. 그녀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창수와 약속했다. 적어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연기를 해서라도 사이좋은 척해야 했다. 이건 할아버지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성창수가 정해은을 친손녀처럼 아꼈기에 그가 화내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심도 조금 있었다. 정해은은 커튼을 젖히고 고개를 들어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보이지 않았고 별도 드물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덩어리째 덮쳐와 잔뜩 흐려있었다. 자선 파티에서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응대하느라 음식을 거의 먹지 않고 레드와인만 마셨다. 게다가 뛰어오기까지 해서 기운이 다 빠졌다. 배가 고팠던 정해은은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늦어 안정숙을 부르기 미안했다. ‘그냥 국수나 말아서 간단하게 먹자.’ 그런데 나오자마자 1층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 성수혁도 배가 고팠는지 부엌에 있었다. 정해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잘됐네.’ 요리 솜씨가 별로라 국수를 맛있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위병이 있어서 그냥 배만 고프지 않게 대충 먹을 참이었는데 이제 보니 직접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생각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예전에 성수혁이 늦게 회의를 마치고 집에 와서 요리할 때 정해은이 잠들기 전이면 불러서 같이 먹곤 했었다. “오빠, 나빴어, 정말. 내가 오늘 전화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어떻게 한 통도 안 받을 수가 있어?” 부엌에서 백유라의 응석 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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