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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외모만 놓고 보면 정해은은 사실 백유라보다 못하지 않았다. 백유라가 그녀보다 유일하게 나은 점이 그저 젊음이었다. 하지만 연예계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변변한 지위나 배경이 없는 신인 연예인은 자본에 이용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 자체가 자본이라면 다른 이들은 자원을 끝없이 퍼다 줄 것이다. 정씨 가문이 아무리 예전보다 못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경성시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해은은 정씨 가문의 외동딸인 데다가 지금은 성씨 가문의 안주인 신분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다. 이제 진심 대신 오직 이해타산만 따지기로 결심한 이상 성씨 가문을 이용할 수 있다면 왜 헛되이 낭비하겠는가? 그날 이후 한 남자에게 목을 매던 정해은은 더 이상 없었고 오직 마음을 닫은 정해은만 존재했다. 주연희네 집안도 투자를 하고 있었고 동시에 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면서 몇몇 신인 배우와 인플루언서를 계약했다. 물론 성한 그룹 산하의 엔터테인먼트에 비하면 조금 뒤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현재 연예계에는 엔터테인먼트가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성한 그룹 산하와 주씨 가문의 엔터테인먼트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별 볼 일 없었다. 주연희가 정해은을 꼭 안아주었다. “그럼 내가 가서 준비할게. 위키 엔터에 들어온 걸 환영해, 해은아.” 그날 밤, 백유라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성수혁의 커플 사진이었다. 정해은은 아무 말 없이 사진을 저장했고 시간도 일부러 캡처했다. 모든 것을 마친 후 휴대폰을 꺼버리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 백유라는 성수혁의 어깨에 기대어 휴대폰을 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참을성이 대단한 여자란 말이지. 내가 이렇게까지 도발했는데도 화내지도 않고 따지러 오지도 않다니.’ 백유라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녀는 정해은이 와서 그녀를 괴롭히기를 바랐다. 정해은이 흥분할수록 그녀의 입지가 더 단단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 화만 내는 미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없었다. 상냥하고 귀엽고 애교가 많으며 가끔 남자의 과시욕을 채워주면 남자는 그녀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뭐 해?” 마침내 서류를 다 처리한 성수혁이 미간을 누르면서 백유라를 돌아봤다. “누구랑 문자하는 거야?” “친한 동료.” 백유라는 다시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 오늘 밤에도 집에 안 갈 거야?” “무섭다며?” 성수혁은 웃으면서 백유라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네가 무섭다는 한마디에 바로 달려왔어. 심지어 회사 서류까지 차 안에서 처리했다고.” 백유라가 눈웃음을 짓더니 그의 목을 끌어안고 가까이 다가갔다. “나 지금 공포물을 찍고 있잖아. 세트장이 너무 무서워. 오빠가 같이 안 있어 주면 밤새도록 잠도 못 잤을 거야.” 성수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게 누가 이런 작품을 고르라고 했어? 자원이 부족하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앞으로는 이런 잡다한 대본은 고르지도 마.” 겁이 많으면서도 굳이 이런 공포물을 찍으려 하다니, 이건 고통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백유라는 일부러 가련한 표정을 지은 채 성수혁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날 영원히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그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거야?” 성수혁은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애정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코끝을 톡 쳤다. “응석만 늘어서는. 너무 무서우면 감독한테 그만두겠다고 해.” 성수혁은 여전히 그녀를 걱정했다. “싫어.” 백유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위약금이 엄청나단 말이야.” 그러자 성수혁이 가볍게 웃었다. “넌 위약금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오빠가 해결해줄게.” 차 안에 백유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품에 안겨 양복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자꾸 이러면 안 돼. 남들이 오빠가 내 돈줄이라고 오해할 수 있어.” 백유라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사람들이 우리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생각하면 어떡해?” “부적절한 관계?” 성수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듯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백유라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두 눈에 불만이 스쳐 지나갔다. ‘오빠는 늘 이런 식이야. 왜 굳이 성인군자처럼 굴려고 하는 건데? 기억을 잃었을 때 우리 부부가 될 뻔했어.’ 백유라는 성수혁이 그녀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어촌에서 만나 서로 사랑했고 그녀의 가족들도 그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거의 부부가 될 뻔했는데 성씨 가문이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백유라는 그 일을 계속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고 그녀에겐 깊은 상처였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왜 수혁 오빠를 강제로 데려갔어? 왜 나랑 오빠의 사랑을 망쳐버린 건데?’ 사실 성수혁이 성한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걸 알았을 때 백유라는 속으로 환희에 찼었다. 그땐 재벌에 시집가서 화려한 안주인이 되는 꿈까지 꿨었다. 그러다 나중에 성수혁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꿈도 따라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날 밤 백유라는 화가 난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방 안의 가구들을 싹 다 부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성수혁은 기억을 되찾은 후에도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꼈기에 여러 면에서 그녀를 챙겨주었다. 한 사람이 성공하면 주변 사람도 덩달아 잘 된다고 했다. 성씨 가문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은 백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졸부가 되었고 백유라는 성수혁의 여동생이 되었다. 백유라는 단순히 여동생으로만 남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라 여자임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함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여자임을. 성수혁은 그녀를 사랑했었기에 다시 사랑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다음 날 정해은은 더 이상 국을 보내지 않았다. 비서 임재휘가 회사 앞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익숙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임재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이 시간이면 이미 오셨을 텐데.” 사실 그동안 가져온 국을 성수혁은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 모두 백유라에게 전달되었고 성수혁이 맛있다고 한 것도 정해은이 매일 만들어서 가져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임재휘는 정해은이 건넨 도시락 가방을 받고 그대로 백유라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임재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떻게 한 사람의 진심을 이렇게 저버릴 수 있어? 대표님은 벌 받을까 두렵지도 않은 건가?’ “임재휘.” 나유정이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해?” 성수혁에게는 임재휘와 나유정 두 명의 비서가 있었다. 백유라는 나유정과 사적으로 사이가 더 좋았다. “또 정해은을 기다리는 거야?” 나유정의 말에 임재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호칭을 바로잡았다. “그분은 사모님이셔.” 그러자 나유정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경멸 섞인 웃음을 지었다. “정해은이 성씨 가문 안주인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임재휘, 설마 아직도 눈치 못 챈 거야?” “뭘?” 임재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표님은 유라 씨를 더 신경 쓰고 있잖아. 유라 씨는 대표님 사무실을 마음대로 드나드는데 정해은은 사모님인데도 불구하고 남편의 사무실에 자유롭게 출입할 자격조차 없어. 심지어 대표님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니, 웃기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법적 아내는 백유라 씨가 아니잖아.” 임재휘는 나유정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저도 모르게 정해은을 변호했다. 나유정이 비웃었다. “그게 무슨 아내야? 남자의 사랑도 받지 못하면서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게 뭐가 좋다고.” 백유라가 나타난 이후로 그녀가 성수혁을 찾으러 회사에 올 때마다 나유정과 마주쳤다. 그렇게 몇 번 만나면서 두 여자의 관계도 많이 가까워졌다. 게다가 백유라는 나유정에게 명품을 아주 아낌없이 선물했다. 하여 나유정은 사적인 감정에서든 다른 이유에서든 백유라를 더 응원했다. “게다가 임재휘 너도 남자잖아. 두 여자 중에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어? 둘 다 예쁘고 각자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 유라 씨가 더 젊잖아. 남자들은 젊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나유정이 끊임없이 몰아붙이자 임재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속으로 정해은을 안타까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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