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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정해은은 연속 며칠 동안 회사에 국을 보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성수혁도 이를 알지 못했다. 백유라가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 왜 국을 가져다주지 않냐며 물어서야 성수혁은 비로소 정해은이 며칠이나 회사에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보름 넘게 가져다주다가 갑자기 가져다주지 않자 성수혁은 마음속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상한... 당황함까지. 가슴이 갑자기 텅 빈 듯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밤 12시, 늘 백유라 곁을 지키던 성수혁이 갑자기 일어나 외투를 걸치더니 한밤중에 돌아갈 채비를 했다. 백유라가 공포 영화를 찍는 동안 성수혁은 낮에는 회사 업무를 처리했고 일이 끝나면 즉시 운전기사를 불러 백유라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는 촬영장 근처의 오성급 호텔 스위트룸을 석 달 넘게 예약했다. 3개월 뒤면 백유라도 촬영을 마칠 터. 성수혁은 백유라의 촬영이 끝난 다음에 별장으로 돌아가 아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한밤중에 들려온 인기척에 옆방에 있던 백유라가 잠에서 깼다. 백유라가 가슴골이 깊게 파인 잠옷을 입은 채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오빠, 이 시간에 회사 가는 거야?” 성수혁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집에 좀 가려고.” ‘집?’ 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백유라는 분노가 치밀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년이랑 함께 사는 곳을 어떻게 집이라 할 수 있어?’ 질투와 원망, 그리고 분노가 백유라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성수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위압적인 기세를 풍겼다. 백유라는 그를 잘 알았다. 지금 저 모습은 집에 가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이때 그녀가 뭐라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눈치가 아주 빨랐고 약한 척하거나 적당히 물러서는 법을 잘 알았다. 아무튼 정해은처럼 어리석지 않았다. 성수혁의 태도가 강경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정면으로 부딪쳐봤자 아무런 이득을 볼 수 없었다. “알았어. 그럼 잠깐만 기다려. 해은 언니한테 전해줄 게 있어.” 백유라는 히죽 웃어 보이고는 방으로 돌아가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뒤지더니 잠시 후 핑크 팔찌를 꺼냈다. “자, 다이아몬드 팔찌야. 사실 오래전에 준비한 건데 촬영 때문에 너무 바빠서 언니한테 직접 전해줄 시간이 없었어. 오빠가 대신 전해줘.” 그녀는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어. 정말 오래 고민해서 고른 거거든.”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성수혁은 웃으면서 백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귀여운 네가 주는 선물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정말?” 백유라의 눈이 반짝이더니 속으로 조용히 물었다. ‘그럼 날 선물로 오빠한테 주면 오빠는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밤길 가로등이 밝게 빛났고 양쪽의 나무와 잔디가 더욱 짙게 보였다. 밤에 보슬비가 내린 데다가 안개까지 끼었다. 멀리서 보면 주변이 흐릿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차량이 다른 세계로 빠져든 듯 어디를 둘러봐도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 운전기사는 차를 천천히 몰았다.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성수혁은 갑자기 이유 모를 짜증이 밀려왔다. 마침내 별장 앞에 도착했고 차가 마당으로 진입했다. 운전기사가 차를 멈추자마자 누군가가 정중하게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성수혁이 며칠 동안 일 처리를 마치면 즉시 백유라에게 달려갔기 때문에 평상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고급 정장을 입은 채 차에서 내렸다. 지금 새벽 1시 30분이라 정해은은 깊이 잠들었을 것이다. 성수혁은 거실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2층이 칠흑같이 어두웠고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30초 정도 지나서야 성수혁은 발걸음을 옮겨 2층으로 올라갔다. 바로 안방으로 가지 않고 정해은이 지내는 게스트룸 앞에 멈춰 섰다. 또 몇 초가 흐른 후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정해은이 문을 잠가놓은 것이었다. 마음속에서 이유 모를 분노가 더욱 거세졌다. 한밤중에 성수혁은 미친 사람처럼 아래층으로 내려가 안정숙에게 게스트룸 열쇠를 가져오라고 했다. 안정숙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황급히 달려와 열쇠를 찾아주었다. 게스트룸의 비상용 열쇠가 여러 개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안정숙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수혁이 한밤중에 잠도 자지 않고 집으로 온 이유가 정해은의 방 문을 따기 위해서라니.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됐어요. 이만 가서 쉬세요.” 성수혁은 열쇠를 받아들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그가 열쇠를 자물쇠에 꽂기도 전에 문이 먼저 열렸다. 문을 연 건 정해은이었다. 연한 하늘색 원피스 잠옷을 잡고 있었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늘어뜨렸다. 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했고 차가우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성수혁은 잠시 넋을 잃었다. “깼어?” 성수혁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고 정해은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네. 시끄러워서 깼어요.” “미안.” 그의 사과에 정해은이 고개를 젓더니 손잡이를 잡고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럼 난 계속 잘게요.” “안방에 가서 자.” 정해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요즘 유라가 촬영 때문에 못 오니까 방에서 자도 돼.” 성수혁이 말을 이었다. ‘백유라가 못 오니까 나더러 방으로 다시 가라고?’ 그녀는 그 말이 너무나 가소롭게 들렸다.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비웃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덤덤했다. “괜찮아요. 이 방 이젠 익숙해졌어요.” “정해은.” 그가 갑자기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이제 그만 억지 부려. 우리 부부야. 부부가 각방 써서야 하겠어? 남들이 들으면 웃을 거라고. 이 사실이 알려져서 파파라치들이 알게 되면 또 무슨 이상한 소문이 돌지 몰라.” 성수혁의 얼굴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정해은은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보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수혁 씨, 파파라치가 우리 집에 CCTV라도 설치했어요?” 성수혁은 순간 멍해졌다. “무슨 말이야, 그게?” “CCTV도 없는데 뭘 그렇게 걱정해요?” 정해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별장 주변 경비가 삼엄해서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집안의 가정부들도 이 집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이라 믿을만하잖아요. 수혁 씨랑 내가 얘기하지 않는데 파파라치가 그걸 알아낼 정도로 대단하다고요?”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성수혁이 아무 말이 없자 정해은이 말을 이었다. “아 참. 수혁 씨 여동생한테도 꼭 전해줘요. 입 조심하라고. 괜히 다른 배우들한테 이런 얘기 함부로 했다간 큰일 나요. 유라만 말하지 않는다면 수혁 씨랑 내가 각방 쓴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 일 절대 없어요.” “유라는 그냥 동생일 뿐이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그렇게 쏘아붙일 필요까지 있어?” 백유라 얘기만 꺼내면 성수혁은 쉽게 발끈했다. 더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정해은은 싸늘하게 웃고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리고 잠그기까지 했다. 성수혁은 닫힌 방 문 앞에서 한동안 서 있다가 어두운 얼굴로 안방으로 돌아갔다. 안방에 오랫동안 아무도 머무르지 않아 썰렁하기만 했다. 평소 화장대에 물건이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백유라가 얼마 전에 놓고 간 화장품만 놓여 있었다. 성수혁은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옷장 문을 열어보니 안에 그의 옷밖에 없었고 옷장 절반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유 모를 분노가 점점 거세져 차가운 얼굴로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하얀 셔츠 속에서 여성 옷 한 벌을 발견했다. 아주 얇았고 촉감이 부드러웠다. 손가락으로 집어 꺼내 보니 다름 아닌 검은색 티팬티였고 심지어 레이스 디자인이었다. 성수혁은 잠시 멍해졌다. 7년 동안 정해은이 이렇게 섹시한 속옷을 입은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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