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어느 순간 성하진은 잠에 빠져들었다.
비몽사몽인 와중에 그녀는 꿈을 꿨다.
중학교 때로 돌아가 자신이 쓴 글이 의학 잡지에 실리는 꿈이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잡지를 집으로 가져왔지만 가족 중 아무도 읽지 않고 슬쩍 훑어보고는 옆으로 던져버렸다.
어머니만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칭찬했다.
호기심에 그녀는 엄마에게 의학 잡지를 알아보는지 물었고,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샘물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네가 쓴 걸 이해하지 못하지만 첫 부분에 네 이름이 있는 건 봤어.”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그날 오후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날 그녀의 문장이 거듭 유명한 잡지에 계속해서 실리고 있지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엄마...”
눈을 뜬 성하진의 눈가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시야에 초조한 표정을 짓는 남자가 보였다.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학교 후배 주지혁이었다.
“선배, 가족들은 선배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것 아니야? 구급대원 말로는 누나가 다 죽어가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밥을 먹고 있었대. 선배가 혼수상태에 빠진 이틀 동안 단 한 명도 보러 오지 않았어.”
그의 분노에 찬 비난을 들으면서도 성하진은 무표정했다.
이례적인 반응에 주지혁은 가슴이 아팠다.
철저히 희망을 버리고 초연해진 게 이런 느낌일까.
“선배, 내가 죽 사 왔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
성하진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주지혁은 거절할 새도 없이 고기죽 한 숟가락을 떠서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성하진은 입을 벌리고 먹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눈앞의 주지혁이 기억 속 한 인물과 겹쳤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성하진은 무엇에 홀린 듯 영정사진을 껴안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학교에 가려 하지도 않아 화가 난 성종구가 가죽 벨트로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때렸다.
동생도 너무 무서워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는데 허찬우가 성씨 가문으로 달려와 작은 몸으로 그녀를 보호했다.
그리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 손수 밥도 먹여주었다.
당시 허찬우는 그녀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었다.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성하진, 이 남자 누구야?”
차가운 목소리에 성하진은 정신을 차렸다.
허찬우는 일그러진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강민영과 사랑에 빠진 후 성하진과의 관계를 끝내기로 결심했던 그였다.
하지만 다정하게 죽을 먹여주는 주지혁을 보며 허찬우의 가슴이 왠지 모르게 시큰거렸다.
자신의 것이어야 할 것을 강제로 빼앗긴 것만 같았다.
주지혁이 설명을 하려던 찰나 허찬우는 아무 말 없이 달려와서 단번에 죽그릇을 내리쳤다.
도자기 그릇이 깨지면서 사방으로 파편이 튀자 성하진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팔에 긴 상처를 입었다.
순식간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고통에 성하진은 몸을 떨었지만 허찬우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암울한 눈빛으로 주지혁을 노려보던 그가 가차 없이 명령했다.
“꺼져.”
성하진이 그만의 장난감이라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데 하필 그때 전화를 받은 그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민영이가 지나치게 자책하다가 우울증이 도져서 약 먹고 자살 기도를 했어. 위세척해야 한다니까 나중에 다시 보러 올게, 알겠지?”
의견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단순히 가겠다고 통보하는 말이었다.
성하진은 피가 흐르는 팔을 감싼 채 그의 매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슬퍼할 게 뭐가 있겠나.
‘허찬우, 8일만 지나면 더 이상 이렇게 가식 떨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