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4장 충분

정기탁은 이런 말을 꺼내면 내가 순순히 요구를 들어줄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태연한 날 보며 정기탁은 마음이 급해졌다.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안 대표님 약혼녀 아니에요?” “난 약혼녀가 아니에요.” “그럼, 돈은 어떻게 건네면 될까요?” “내가 만약 기탁 씨한테 돈을 건넸다면 그 기록을 확인한 경찰이 내가 증인을 매수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두 사람의 증언은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을 텐데 내가 얻는 게 뭐가 있죠?” “호준 씨 치료비는 보험사에서 부담할 테니 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지금 기탁 씨가 가지고 있는 증거... 혼자 가지고 있기엔 무섭지도 않아요?” 어떤 상황인지는 뻔했다. 정호준이 진작 증거를 손에 쥐고 있었고, 그 가치를 계산하느라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혹은, 증거가 불충분해 내 도움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도 상대가 너무 강력해 증거를 꺼내는 것도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뭐가 어찌 되었든 증거가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난 펜던트 안에 담아둔 USB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기탁 씨가 아버지 구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이번 사건의 원흉은 내가 아니에요.” “안 대표님을 돕는다면 추후 안후 그룹도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해줄 거예요. 그리고 지금 기탁 씨가 날 돕는 건 결국 본인 스스로를 돕는 것과 같아요.” “벌써 호준 씨한테 손을 뻗었는데 그다음은 누가 될 것 같아요?” 정기탁은 몸을 부르르 떨었고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정기탁처럼 어리고 혼란스러웠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였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이용당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난 정기탁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정기탁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내 말을 들은 정기탁은 무기력하게 고개를 푹 숙였고 한참 뒤, 묵직한 핸드폰을 꺼냈다. “안에 든 영상 확인해 보세요. 카메라로 찍어 보관한 영상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