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황영진의 질문에 성혜란은 바로 말을 가로채며 대답했다.
“황 PD님 안녕하세요, 저는 임수아와 임현지의 어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듣자 황영진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수아와 임현지가 자매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성혜란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웃으며 물었다.
“황 PD님, 듣자 하니 저희 수아와 친구 사이라고 하시던데요, 맞죠?”
황영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임수아가 ‘달빛 청음’이라는 사실은 비밀인데 성혜란이 이렇게 묻는 걸 보니, 그녀는 딸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황영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성혜란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 수아의 언니인 현지를 선택하셔야죠. 현지는 정말 실력 있는 성우거든요. 개인 역량이 아주 뛰어나고 또...”
“여사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영진이 말을 끊었다.
“비무의 더빙 배우는 이미 더 적합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혜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황영진을 보며 말했다.
“더 적합한 사람이라니요? 황 PD님,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이 역할을 위해 우리 현지는 집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고민해 왔어요. 누구도 그녀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혹시... 누군가가 PD님 앞에서 우리 현지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했나요?”
황영진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성혜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황 PD님, 수아 그 아이는요, 언니와의 사이가 음... 별로 좋지 않아요. 그래서 언니에게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시기심에 눈이 멀어 훼방을 놓으려 할 수도 있으니 부디 저희 수아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수아 말만 믿고 판단하지 말아 주세요.”
그제야 황영진은 상황 파악을 마쳤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자신이 임현지를 캐스팅하지 않은 이유가 임수아가 자신에게 언니 험담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딸을 어떻게 생각하면 저런 황당한 망상을 할 수 있는 걸까?
황영진은 임수아를 위해 억울함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여사님, 수아는 제 앞에서 언니에 대한 나쁜 말을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다가 손을 들어 컴퓨터를 조작했다.
“여기 음성 파일이 하나 있습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성혜란과 임현지는 즉시 귀를 기울이며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오디오가 흘러나오자 두 사람의 안색은 점점 굳어갔다.
오디오가 끝나자 황영진은 성혜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저희가 최종적으로 캐스팅한 비무의 성우입니다.”
성혜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붉어졌다 하며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딸을 아끼는 마음이 크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감히 딸이 이 사람보다 더 잘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반면 임현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황영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저분 ‘달빛 청음’인가요?’
황영진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임현지는 눈을 크게 뜨고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달빛 청음’은 성우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으니까.
그녀가 대학 시절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더빙했던 캐릭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후 그녀는 잇달아 두 편의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 더빙을 맡았다.
두 드라마 모두 연이어 대박을 터뜨렸고 여자 주인공의 목소리는 캐릭터에 매력을 더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그 덕분에 성우계는 그녀의 실력을 더욱 인정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데뷔와 동시에 정점을 찍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건 이후 그녀가 더빙 업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명성은 여전히 드높았다.
임현지 또한 ‘달빛 청음’의 팬이었다.
그런데 ‘안개꽃’ 제작진이 그녀를 다시 섭외했다니.
이는 곧 ‘안개꽃’이 ‘달빛 청음’의 복귀작이 된다는 뜻이다.
이 홍보 효과는 엄청날 것이었다.
성혜란은 체면이 좀 깎이는 듯하자 눈을 끔뻑거리며 억지를 부리듯 말했다.
“이것도 뭐 그렇게 대단한 실력은 아니구먼! 우리 현지보다 아주 쪼끔 나은 정도지.”
황영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임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경멸이 담겨 있었다.
“임현지 씨, 이번 오디션 탈락은 순전히 실력 부족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잠시 멈췄다가 코웃음을 치며 계속 말했다.
“앞으로는 남 탓하기 전에 자신의 실력부터 키우세요. 괜히 남을 모함하는 못된 버릇도 고치시고요.”
이 말을 듣자 임현지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러자 성혜란은 발끈하며 소리쳤다.
“지금 뭐라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영진은 냉정하게 말을 잘라버렸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주시죠.”
“엄마, 어서 가요.”
임현지는 성혜란의 팔을 잡아끌며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임현지의 눈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억울함에 젖은 얼굴로 흐느꼈다.
“엄마, 저... 저는 정말 수아를 모함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저도, 저도 그냥 제 친구가 수아가 황 PD를 찾아갔다고 말해서... 저...”
성혜란은 임현지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울지 마, 울지 마. 네가 어떤 사람인지 엄마가 모를 리가 있겠니? 엄마는 널 믿어.”
콧물을 훌쩍이던 임현지는 죄책감에 젖어 말했다.
“수아를 오해해서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당장 수아에게 전화해서 용서를 빌어야겠어요.”
...
임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시각, 임수아는 마침 법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이었다.
“수아야.”
임현지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임수아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용건만 말해.”
그녀와 감정 소모를 할 여유 따위 없다는 듯 임수아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콧물을 훌쩍이며 임현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랑 엄마가 오늘 황 PD님을 찾아가서 성우 일에 혹시나 기회가 있을까 알아봤는데, 황 PD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나와 엄마가 전에 너를 오해했다는 걸 알게 됐어. 미안해, 수아야. 용서해 줘.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임현지의 사과에 임수아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쌀쌀맞게 말했다.
“다른 일 없으면, 끊을게.”
사과?
그녀는 필요 없었다
임수아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갑자기 전화기 너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끊지 마!”
“수아야! 네 언니가 사과하는 거 안 들려? 왜 대꾸가 없어? 네 언니가 너 오해한 거 알고는 미안해서 울기까지 했어. 어떻게든 네게 전화해서 사과하겠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너 지금 그 태도는 뭐니? 그래, 우리가 너한테 잘못한 거 맞아. 하지만 가족끼리 살다 보면 다툴 수도 있는 거잖아? 이미 지난 일인데 언제까지 그렇게 꼬투리 잡고 물고 늘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