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라는 옆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얼음물 한 병을 꺼내 천천히 뚜껑을 따서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은미라는 여태껏 얼음물을 마신 적이 없는데, 이때 마음속으로는 이미 비바람이 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음침했다. 차가운 목소리는 안개가 한층 덮인 듯 고르지 않은 숨소리와 함께 낮게 억눌렸다.
“알려줘요. 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요.”
고인호는 두 눈썹을 찌푸린 채 표정이 한껏 어두워졌다.
“라영이가 고씨 가문에서 입양한 딸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는데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왜 감히 저에게 정면으로 대답하지 못하는 거예요?”
일이 이 지경이 되니 그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미라가 했던 말에 관해 고인호도 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심지어 그가 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왜 다들 날 속였어요!”
오랫동안 쌓인 답답함과 분노가 마침내 이 순간에 폭발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울부짖으며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마음속에 숨겨둔 억울함을 모두 털어놓았다.
고인호가 라영을 입양한 것은 자신의 친구에게 아내와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다.
그들의 부주의로 라영의 어머니는 집에서 난산을 겪었고 가정부에게 발견됐을 때 이미 과다 출혈의 기미가 보였다.
고인호가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라영의 엄마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해외의 의료 기술로는 비극의 발생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출산 당일 고씨 부부는 업무상 일로 바빠 제때 그녀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
이것은 고인호에게 있어서 줄곧 마음속의 병이었다.
그래서 라영이를 대할 때 특별히 신경을 썼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고현진은 그들의 거짓말을 믿었다.
어린 남녀가 매일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지내면서 점차 서로에게 남매 사이를 초월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대가족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 고씨 가문의 부모님이 일부러 압박하면서 사춘기의 아이들은 부모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