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7화
‘명빈은 원래부터 나를 그렇게 싫어했는데, 왜 갑자기 도와주겠다고 한 걸까? 희유 때문일까?’
석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약상자를 들고 방을 나섰다.
차에 올라탄 명빈은 마음이 괜히 뒤숭숭해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빨자 연기가 차 안에 퍼져 나갔다.
머릿속에는 석유가 강간당했다고 말하던 순간의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너무도 평온했고 심지어는 무심하기까지 했다.
그때의 석유는 분명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조금씩 자신을 치유해 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음속에는 두꺼운 보호막이 생겼고, 더 이상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으며 모든 남자를 혐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석유가 그렇게까지 희유를 지키려 하는 것도, 아마 희유가 어린 시절의 자신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큰 상처를 겪고도 버텨냈으니 이제 무슨 일이 생겨도 석유를 쉽게 흔들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늘 차갑고 침착한 것이었다.
명빈은 이것이 동정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연이 너무 참혹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전에 가지고 있던 편견은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 일을 알게 된 이상, 절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
한편, 석유는 회사로 돌아갔고, 김하운은 곧바로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문을 닫은 김하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석유는 담담하게 답했다.
“아무 일 없어요.”
“아무 일 없는데 왜 일을 다 넘겼어요? 민래 씨가 또 곤란하게 한 거예요?”
김하운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석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집에 일이 좀 있어서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퇴사하려는 거예요?”
김하운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석유는 잠시 멈칫했다가 말했다.
“가능성만 있을 뿐이지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에요.”
김하운은 순간 마음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고 어딘가 불안해지기도 했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집에 일이 있으면 휴가 내면 돼요.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다 해결하고 돌아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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