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친부모
재율 그룹 계열사의 건물 위.
헬리콥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천천히 헬리패드 위에 착륙했다. 잠시 후, 시동이 꺼지자 문이 스르르 열리고 곧바로 한 여성이 밖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장시간의 비행으로 피곤하셨을 텐데 먼저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사무실로 가죠.”
권해나의 입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절로 감탄이 튀어나올 만큼의 예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 이렇다 할 감정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남자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그녀의 비서를 안내했다. 사무실로 가는 길, 그는 줄곧 의문이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정말 대표님이 아닌 팀장부터 시작할 생각이십니까? 아가씨 정도의 실력과 경력이면 바로 대표님 자리에 오르시는 게...”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가겠다고 이미 정했어요. 대표 자리에 바로 오르게 되면 직원들이 불필요한 의문을 품게 될 거예요.”
권해나는 그렇게 얘기하며 대화를 중단해 버렸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권해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영상통화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엄마였다.
“해나야, 잘 도착했어?”
남수희가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너를 낳아준 친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갈 거니? 우리 가문과 달리 작은 가문이라 네가 거기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시 엄마 곁으로 돌아올래?”
이윽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도착한 지 1시간도 채 안 된 애한테 그런 말을 왜 해?”
권재호가 남수희를 다그치며 말했다.
“뭐가 됐든 우리 해나를 낳아준 분들이야. 우리 좋자고 해나를 영원히 우리 품에만 끼고 살 수는 없어. 임씨 가문 사람들이 우리 해나를 예뻐하고 사랑해 주면 해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두 배로 받게 되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야? 물론 그쪽에서 해나를 반기지 않으면 그때는 내가 직접 가서 해나를 데려올 거야. 그런 집안 상종할 가치가 없으니까.”
권해나는 두 사람의 말에 가슴이 금세 따뜻해졌다.
“고마워요. 하지만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여태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왔는데 단지 친딸이라는 이유로 갑자기 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해나 너는 나와 네 엄마가 모든 사랑을 다 쏟아부어 키운 딸이니까. 너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어. 가정교사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너처럼 학습 능력이 뛰어난 애는 처음 본다고 했던 걸 우리는 아직도 기억해. 그리고 어디 학습 능력만 좋아? 응용 능력도 뛰어나서 예체능은 물론이고 의학과 금용 쪽에서도 천재라며 여러 번 이름이 거론됐잖아. 그런데 누가 너를 안 좋아해?”
권재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 아빠 말이 맞아. 네가 찾아가면 임씨 가문은 복 받은 거지. 솔직히 해나 네가 아니었으면 뒤에서 몰래 임씨 가문에 투자도 하지 않았을 거고 지원도 해주지 않았을 거야. 임씨 가문이 서강시의 5대 명문 가문 안에 들 수 있었던 건 다 네 덕이야.”
남수희도 한마디 했다.
권해나는 경기를 뛰기 전 어린아이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듯한 부모님을 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 아빠, 내가 항상 사랑하는 거 아시죠?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엄마랑 아빠예요.”
“당연하지. 우리도 해나 너를 제일 사랑해.”
권재호와 남수희도 똑같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막 도착해서 할 일이 많을 테니까 이만 끊을게. 엄마랑 아빠는 이따 함께 낚시하러 갈 거야.”
“네, 알겠어요. 오늘은 싸우지 마시고요.”
전화를 끊은 후, 권해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강시는 경인시 다음으로 발전한 도시로 그녀의 친부모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가 권씨 부부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1년 전이었고 권씨 부부는 사랑하는 딸을 위해 직접 친부모를 찾아주었다.
권해나가 이곳 서강시로 온 건 재율 그룹의 계열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함뿐만이 아니라 친부모님을 한번 뵙고 싶어서다.
“선물은 다 준비됐습니까?”
권해나가 물었다.
“네, 아가씨. 지금 바로 기사한테 차 대기시키라고 할까요?”
그녀의 말에 비서가 얼른 옆으로 다가왔다.
“일단은 먼저 씻어야 해야겠어요. 그러고 나서 출발하죠.”
“네, 알겠습니다.”
샤워를 마친 권해나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소파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회사에 관한 모든 자료가 놓여 있었다. 그중 프로젝트 관련 자료 하나에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서임 그룹?”
서임 그룹은 그녀의 친부모가 운영하는 회사였다. 자료를 훑어보니 협력을 원하는 듯했지만 아무리 봐도 계약을 체결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권해나는 한참을 더 훑어보다가 결국에는 본부장더러 사인하게 하라며 비서에게 얘기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회사에서 나와 임씨 부부가 살고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그녀가 운전한 차량은 경인시에서 줄곧 몰고 다니던 고급 세단이 아닌 일반 직장인들도 쉽게 구매할 수 있는 회사 차였다.
임씨 가문은 권씨 가문과 비교하면 매우 작은 가문이었기에 지나치게 비싼 차를 몰고 가면 임씨 부부가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까.
...
임씨 저택.
서강시의 5대 명문 가문 중 하나라 그런지 외관이 무척 화려했다. 게다가 오늘은 임하늘이 시 피아노 콩쿠르에서 금상을 타 전국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게 된 경사스러운 날이라 장식 같은 것들이 유독 더 화려했다.
거실 안.
“하늘아, 네가 최고야. 정말 대단해!”
채진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딸을 칭찬했다.
이에 임하늘은 쑥스러운 듯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딸, 왜 그래?”
채진숙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임수찬도 동생이 걱정됐는지 케이크를 먹고 있던 손을 우뚝 멈추며 임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게...”
임하늘이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곧 이 집으로 돌아오게 될 언니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돼서요. 그간 제가 언니 자리를 빼앗은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눈물을 살짝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에 채진숙과 임수찬은 가슴이 다 찢기는 것 같았다.
“하늘아, 걱정하지 마.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딸이야. 네 언니가 혹시라도 너를 질투하면 그때는 엄마가 한 소리 할게. 절대 너를 속상하게 안 해.”
임하늘은 그녀의 말에 감동한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때 임무원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위층에서 내려왔다.
“여보, 세한 그룹이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겠대!”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채진숙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래! 내일 정식으로 얘기를 나누자고 방금 나한테 연락이 왔어. 이 정도면 계약을 따낸 거나 다름없지!”
“역시 무사히 체결될 줄 알았어요!”
임하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임무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소파로 다가왔다.
임하늘은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가렸다가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는 듯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아빠한테 힘이 되고 싶어서 얼마 전에 세한 그룹의 대표님을 직접 찾아뵀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그 부탁을 들어주셨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