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이씨 왕조, 동궁 한편에서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김신재는 자신의 손발에 차가운 족쇄가 채워진 채 나뭇간에 누워 있다는 걸 확인했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는 곧 고대로 타임슬립해 한 환관의 몸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이 환관은 신분이 특수한 가짜 환관의 몸으로 남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휴, 다행이네.”
김신재는 육체가 무사한 것에 안도한 것도 잠시, 오늘 밤 비밀리에 처형될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떠올렸다.
사흘 전, 동궁에서 연말 대청소를 진행하던 중 세자 이무열의 서재 청소를 맡은 김신재는 그만 깜빡하고 문밖에 청소 중 팻말을 걸어두지 않았다.
서재 마룻바닥을 닦고 있을 때 이무열이 갑자기 세자빈 강청연과 우림군관 이무령과 함께 비밀 이야기를 나누고자 서재로 들어왔다.
세자의 서재는 기밀 장소라 원래 김신재 소관이 아닌지라 그는 응당 바로 나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즉시 물러나야 했다.
허나 세자의 천지 벽력같은 발언에 놀란 김신재는 감히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무열은 일찍이 전쟁을 치르던 중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중상을 입었던 것이었다.
혼인한 지 3년이지만 세자빈 강청연은 회임은커녕 아직 처녀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청연은 덕헌국 제일 미녀로 정상적인 남자라면 이런 미녀를 옆에 두고 몇 년 동안 참지는 못했을 터였다.
밖에는 유언비어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기에 덕종의 귀에 들어간다면 세자의 자리도 지켜내기 어려웠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가장 큰 불효는 후손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자식을 못 가진다면 세자는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하여 이무열은 강청연의 이번 친정 방문을 계기로 후사를 위한 밀책을 도모하고자 했다.
일이 성사된 후 이무령이 쥐도 새도 모르게 상대방을 제거해 감쪽같이 모든 사람들을 속일 생각이었다.
덕헌국 세자이자 왕위 계승자로서 이런 낯부끄러운 비밀을 하인 따위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김신재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단언했지만 이무열은 여전히 그를 처형하기로 했다.
김신재는 싸늘한 목을 만지며 나뭇간 바닥에 누워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을 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고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도 타임슬립 전 군사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현대 교육을 받은 수재였는데 이렇게 죽음을 기다린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바로 이때 나뭇간 문이 살짝 열리더니 궁녀 한 명이 몰래 들어오더니 문을 안으로 잠갔다.
세자빈의 몸종 청이가 뜨거운 양탕을 한 그릇 들고 들어와 김신재의 앞에 놓았다.
“얼른 드십시오. 다 드시고 나면 소원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김신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원이라니요?”
청이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전에 저한테 장난치면서 여인 몸에 손대본 적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눈 감기 전에...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김신재는 그제야 전에 청이한테 집적거렸을 때 환관이라고 싫어하면서 하마터면 세자빈에게까지 고발할 뻔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왜 갑자기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겁니까?”
“저하의 서재는 늘 제가 청소했습니다. 마침 그날 제가 몸이 편찮아서 민 내관께서 저 대신 보낸 것이니 보상이라고 생각하시고 저승에 가서 저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청이는 조금 찔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빈 옆에서 일하는 궁녀인지라 세자의 몸 상태에 대해 아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왕실에서 하인으로 지내는 건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아 수시로 목이 날아갈 수 있기에 그날 일부러 그 자리를 피했을지도 몰랐다.
“이 환관이 그대 대신 생을 마감한다는 말입니까...”
김신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일각 정도밖에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주십시오.”
말을 마친 청이는 빠르게 허리띠를 풀고 풀더미 위에 수줍게 누워 눈을 감은 채 긴장이 역력한 모습으로 김신재를 기다렸다.
상대가 환관의 몸인지라 처녀의 몸을 잃을까 봐 두렵지는 않았다.
청이는 궁녀일 뿐만 아니라 동궁 최고의 무희이기도 했다. 궁에서 주상 전하와 대신들을 위해 공연한 적도 있었으며 몸매는 요염하고 얼굴은 아름다웠다.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잡초 더미 위에 초라하게 누워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는 절세미인의 모습에 김신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김신재가 장난스럽게 청이의 잘록한 허리를 살짝 꼬집자 그녀는 놀라서 흠칫하더니 입술을 깨물고 온몸을 떨었다.
과거의 김신재였다면 죽기 전에 쾌락을 즐기면서 눈앞의 여인에게 동궁의 진정한 남자가 누구인지 보여줬겠지만, 지금의 김신재는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장난만 치고 동작을 멈추었다.
“필요 없으니 일어나시지요.”
청이는 놀라서 눈을 떴다.
“저를 원하지 않는 겁니까?”
“저는 죽지 않을 겁니다. 앞날이 기니 급해할 필요 없습니다.”
김신재는 웃으며 대답했다.
“앞날이 어디 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오늘 밤이면 이 군관께서 처형할 겁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저하께서 과제를 제출하는 마지막 날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쯤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했을 테니, 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관한 시사를 썼는데 분명 주상 전하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만 대신 전해 주십시오.”
“글도 제대로 모르는 환관이 시사를 어떻게 쓴단 말입니까? 거기다가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라니요?”
청이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제 말대로만 전해 주시면 이번 일은 보상한 걸로 치겠습니다. 덕헌국이 대성할 때쯤 그대를 가져도 늦지 않습니다.”
김신재는 자신 있어 보였다.
덕헌국은 무예로 일어선 나라인지라 전투에 능했지만 문화적인 분야에서는 아직 그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조정 대신들도 대부분 무장 출신인지라 글을 잘 알지 못했기에 김신재 같은 최하층 환관이 글을 안다는 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현재 천하는 평화롭지만 민생이 피폐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어갔으며 사방에서 내란이 일어나고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의 무장들은 진압할 줄만 알았지 다른 방법은 전혀 내놓지 못했다.
주상은 전쟁을 멈추고 무예 대신 문학을 중시하기로 마음먹고 세상에 널리 경제를 부흥시킬 문학 인재를 모집했다.
모든 왕실 자손들도 문화 수업을 열심히 배워야 했으며 주상이 직접 감독하면서 매달 국정 과제를 내주었다.
세자는 왕위 계승자로 당연히 더 높은 문화 수준을 요구했다.
하지만 태어나기를 투박한 무장으로 태어난 이무열은 글을 쓰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책을 내세우는 등 세심함을 요하는 일에는 전혀 재능이 없었기에 늘 스승에게 의지하여 과제를 완성했다.
구월에는 갑자기 영감이 떠오른 스승 덕에 치국책으로 아래와 같이 적어 바쳤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노라.]
주상은 크게 기뻐하며 이와 같은 평을 남겼다.
[점점 깨달음을 얻어가는구나. 부디 더욱 힘쓸지어다.]
시월에 더 이상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던 스승은 이와 같이 가르쳤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소와 양을 삶는 것과 같노라.]
주상은 조금 의아하여 평가했다.
“지난달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십일월부터 무식한 스승의 밑천이 드러났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닭을 볶는 것과 같노라.]
주상은 크게 노하여 평가했다.
“먹고 마시는 일밖에 모르는 것이냐. 정녕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싶은 것이라면 과인이 허락하마.”
화가 난 이무열은 스승을 호되게 곤장질하고 동궁에서 쫓아냈고, 지금 연말 최종 평가 날이 됐지만 아무런 글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
유시, 세자의 서재 죽간에는 붓글씨로 삐뚤삐뚤하고 흉측하기 짝이 없는 제목 석 자만 쓰여있고 내용은 여전히 백지장이었다.
[치국책.]
수백 명의 동궁 하인과 문객들이 일제히 무릎 꿇고 세자의 욕설을 듣고 있었다.
“평소 좋은 건 다 주면서 호의호식하게 해 줬거늘 어찌 한 달 내내 몇 마디 시사도 짓지 못하는 것이냐? 개도 주인에게 보답할 줄은 아느니라. 유시가 되었으니 아바마마와 8대 유현들도 어서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 얼른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때 환관 한 명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저하, 서 총관께서 과제를 받아 가려고 직접 오셨사옵니다. 그리고 전하의 어명을 전하셨사옵니다.”
“무슨 어명이더냐?”
이무열이 약간 긴장하며 묻자 환관도 따라서 긴장하여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주상, 주상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저하께서 여전히 아무런 진보가 없으시다면 날씨도 추운데 시간만 지체하지 마시고 즉시 입궁하여 겸허히 다른 왕자님들께 시사와 가부 그리고 치국 글을 짓는 법을 배우라고 하셨사옵습니다.”
이건 이무열에 대한 공공연한 모욕과 다름없다.
이무열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민 내관을 발로 걷어차서 넘어뜨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쓸모없는 것들, 모조리 목을 베어라.”
이무열이 말을 마치고 검을 뽑아 들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소인이 아둔하여 죽을죄를 지었사옵습니다.”
세자빈 강청연은 고개를 저으며 이무열을 말렸다.
“저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이무열이 성격이 난폭하고 충동적이며 화를 쉽게 내는 데다가 자식도 가지지 못하여 세자로서 부족하다고 소문이 돌아 주상도 이미 세자를 교체할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다.
세자빈은 제후국 연제의 무연 공주로 세자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세력이기에 이무열은 강청연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으며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부인, 어릴 적부터 거문고와 가무 그리고 바둑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소?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라도 괜찮소.”
“저하, 소첩은 여인이라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배운 바 없사옵니다. 소첩이 배운 것들은 큰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여인의 기예에 불과하옵니다.”
강청연도 어찌 할 방도가 없다는 듯 답했다.
이때 무릎을 꿇고 벌벌 떨고 있던 청이가 김신재의 부탁을 떠올리며 용기 내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하, 김신재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관한 시사를 썼다 하옵니다. 분명 주상 전하의 마음에 들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김신재가 누구더냐? 당장 일어나 보거라.”
이무열이 사람들을 향해 호통치자 강청연은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이무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흘 전에 서재에서 비밀을 엿들었던 환관이 바로 김신재입니다.”
강청연은 비밀이 발각된 것이 생각나서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