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고개를 숙인 고태준은 서류 위에 적힌 글을 보았다.
“심유나, 적당히 해.”
고태준이 손을 뻗어 심유나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 그건 고태준이 심유나를 달랠 때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그러나 심유나는 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고태준의 손은 허공에 멈췄고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는 서서히 사라졌다.
“만지지 말아요.”
심유나는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혼합의서를 든 고태준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이혼하겠다는 내용을 확인했을 때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유나야, 너 바보야? 내가 그동안 가르친 건 다 잊은 거야?”
고태준은 심유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정말 이혼하게 되면 너한테 엄청 손해잖아. 그만 화 풀어.”
기념일에 같이 밥을 먹지 못한 것뿐인데 이혼이라니.
고태준이 오늘 차를 타고 빠르게 달려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심유나는 이미 떠난 상태였다.
다음에 시간을 내서 보상해 주기 위해 고태준은 고객과 약속을 잡은 뒤 밤새 술을 마셔서 수천억 원대의 계약을 성사했다.
그가 카레이서의 꿈을 포기하고 회사를 물려받은 건 모두 심유나를 위해서였다.
고태준은 그녀와 함께 있어 주겠다고 하고 약속을 또 어겼다.
그러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중요한 일이 있었고 또 빨리 돌아오기 위해 교통사고까지 낼 뻔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보상해 주려고 수백억대의 목걸이도 선물해 주었다.
고태준은 팔을 뻗어 심유나를 안으려고 했으나 심유나는 고태준을 밀어냈다.
“화난 거 아니에요.”
고태준을 바라보는 심유나의 눈동자에서는 더 이상 그를 향한 애정과 의존이 보이지 않았다.
“태준 씨, 우리 이혼해요.”
“그만해!”
고태준은 손을 뻗어 이혼합의서를 사정없이 구겼다.
“투정도 적당히 부려야지. 자꾸 이런 재미없는 짓 좀 하지 마.”
고태준이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소파 등받이를 짚고 심유나를 품 안에 가두었다.
“지금 그 말을 거둬들인다면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할게.”
고태준은 심유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로지 그만 바라보던 심유나가 그를 떠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유나가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새로운 수단을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심유나는 그의 몸에서 술 냄새와 여자 향수 냄새가 느껴지자 구역질이 나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비켜요. 난 진심이에요.”
“그래. 진심이란 말이지?”
고태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심유나, 언제까지 그런 헛소리를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
고태준이 문을 쾅 닫고 떠났다.
심유나는 엔진 소리가 멀어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몸에서 힘을 뺐다.
그날 밤 고태준은 돌아오지 않았고 심유나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도현우였다.
도현우는 고태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는 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흠잡을 데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고태준의 지인들 중 유일하게 심유나를 진심으로 받아준 사람이기도 했다.
심유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유나야, 너... 태준이랑 싸웠다면서?”
도현우의 목소리는 봄바람과 같아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심유나는 휴대폰을 들고 말했다.
“저 이혼하려고요.”
“휴, 태준이가 성격이 좀 그렇긴 해. 좀 져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래도 말만 그렇게 하지, 마음은 약한 애야.”
도현우는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
“태준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어. 유나야, 너도 알잖아. 태준이는 굉장히 의리 있는 성격이야. 게다가 명식 아저씨가 태준이를 구하려다가... 태준이는 정말로 책임감 때문에 백하윤을 챙기는 거야.”
도현우는 고태준의 편을 들면서도 심유나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
책임감 때문에 심유나와의 약속을 번번이 어기는 게 옳은 일일까?
“현우 오빠, 벌써 15년이에요. 저도 이제는 지쳤어요.”
지쳤다는 말이 그 어떤 말보다도 안쓰럽게 들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고요.”
“그런 말 하지 마.”
도현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다.
“너희 오랫동안 만났잖아. 그런데 그냥 이렇게 헤어진다고? 내가 대신 혼내줄까? 너 화 좀 풀리게.”
“됐어요.”
심유나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고태준과의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는 것이었다.
한편, 도현우는 전화가 끊기자 얼굴에서 온화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느긋하게 라이터를 만지작댔고, 튀어 오르는 불꽃 사이로 남자의 흥분 어린 눈빛이 비쳤다.
잠시 뒤 도현우는 고태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태준아. 너 어디야?”
“회사.”
고태준의 목소리는 숙취 때문에 살짝 거칠었고 약간의 짜증도 느껴졌다.
도현우는 피식 웃었다.
“왜? 또 우리 공주님을 화나게 한 거야?”
“나랑 이혼하겠대.”
고태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난 또 큰일인 줄 알았네. 여자는 원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때가 많잖아. 이혼하겠다고 한 것도 네가 더 신경 써주기를 바라서가 아닐까?”
고태준은 침묵했다.
“태준아, 내가 조언 하나 할게. 달래주는 건 좋지만 나쁜 버릇을 들이면 안 돼. 네가 먼저 나서서 사과한다면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번에는 좀 단호하게 나가는 게 좋을 거야. 3일 정도 내버려두면 먼저 너한테 연락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할지도 몰라.”
고태준은 도현우의 말을 듣자 출구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도현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심유나는 그를 오랫동안 사랑했으니 그를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좀 심하긴 했지. 분수를 알게 해줘야겠어.’
“알겠어, 고마워.”
고태준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도현우의 조언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