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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화상 회의 화면 속에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임원들이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고태준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흥미 없는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진경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고태준이 전화를 끊자 진경희가 또 전화를 걸었다. 고태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는 화면 너머 사람들을 향해 덤덤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5분만 쉬겠습니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한 뒤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에요?” 고태준은 인내심이 없었다. 전화 너머에서 곧바로 진경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준아, 나는 진짜 네 아내를 못 견디겠어!” 고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걱정되는 마음에 직접 걔를 찾아가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하려고 했는데 글쎄 나를 자기 집에서 쫓아냈다니까? 게다가... 우리 고씨 가문은 자기 같은 대단한 사람을 품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 진경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고태준은 말없이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심유나의 냉담한 표정이었다. 고태준이 알고 있는 심유나는 고집스럽긴 해도 절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심유나는 진경희에게 대들기는커녕 감히 그녀의 앞에서 큰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태준아, 듣고 있니? 걔 같은 여자는 우리 집안에서도 받아줄 수 없어. 그러니까 당장 걔랑 이혼해!” “그만하세요.” 고태준이 쌀쌀맞게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건 제 집안일이니까 앞으로는 간섭하지 마세요.” 진경희는 고태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네 엄마야!” “네, 그러니까 명심하세요. 엄마는 제 엄마지, 유나 엄마가 아니에요.” 진경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너 뭐라고 했어? 지금 심유나 걔 때문에 나한테 소리를 지른 거야?” “유나는 제 아내예요.” 고태준의 목소리에서 은근한 위협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유나 귀찮게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면 세계 여행이라도 떠나세요. 비용은 제가 낼게요.” 고태준은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소파 위에 던졌다. 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겼지만 마음속에 쌓인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이제는 막 나가네?” 감히 그의 엄마와 싸우다니. 그 순간 메시지가 도착해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태준 오빠, 유나 언니 탓하지 마. 유나 언니는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홧김에 아줌마랑 그런 얘기를 한 걸 거야.] [아줌마도 그냥 걱정되는 마음에 그랬겠지만... 다 내 탓이야. 나만 아니었어도 두 사람 싸울 일은 없었을 텐데.] [어서 유나 언니 좀 달래 줘. 밖에서 혼자 지낸다니까 걱정되네.] ‘걱정? 내가 걱정할 필요가 있어? 지금 아주 득의양양할 텐데!’ 고태준은 차 키를 들고 성큼성큼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회의는 이만 끝마치겠습니다.” 심유나의 아파트에 도착한 고태준은 차 안에 앉아서 일단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치밀어 오르던 분노를 억지로 눌렀다. 고태준은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일단 말로 설득한 다음에 효과가 없으면 그때 다시 강압적인 수단을 쓸 생각이었다. 지난번처럼 바로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되었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아내가 혼자 밖에서 지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고태준은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편한 옷차림의 심유나가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길을 묻는 낯선 이를 대하는 듯한 담담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안일함마저 느껴졌다. 그런 모습이 애써 억눌렀던 고태준의 분노를 다시금 자극했다. “축하해, 심유나.” 고태준은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엄마랑 싸워서 이겼다면서? 많이 컸다. 기분 좋겠어?” 고태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심유나의 뺨을 꼬집으려고 했다. 그것은 예전에 고태준이 심유나를 달랠 때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그러나 심유나는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탁 소리 나게 가차 없이 고태준의 손을 쳐냈다. “건드리지 말아요.” 심유나의 목소리는 가을밤보다도 더 서늘했다. 고태준의 손이 허공에 멈췄고, 그의 손등 위로 붉은 흔적이 생겼다. 고태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심유나를 바라봤다. “대체 언제까지 성질부릴 거야? 이 정도면 됐잖아. 우리 엄마가 잘못했더라도 너한테는 집안 어른이야.” 심유나는 불같이 화를 내는 고태준의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당신 엄마지 내 엄마가 아니에요.” 심유나는 칼같이 선을 그었다. “그리고...” 심유나는 고개를 들어 고요하게 그의 노여워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혼 절차는 언제 밟을 거예요?” 심유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혼을 입에 담았고 그 모습에 고태준은 크게 자극받았다. “나는 이혼 안 한다고 했어.” 고태준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심유나의 손목을 낚아챘으나 힘을 너무 많이 주지는 않았다. “심유나, 이혼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심유나는 고태준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 그의 손을 뿌리쳤다. “건드리지 말라니까요!” 고태준은 원망이 실린 그녀의 힘에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등이 벽에 부딪혀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순간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며 온몸에서 모욕감과 분노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고태준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려 벽을 힘껏 발로 찼다. 그가 아파트 아래로 내려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도현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태준아, 유나 만나러 간 거야?” 고태준은 그렇다고 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아직 가시지 않은 분노가 느껴졌다. “또 싸운 거야?” “나랑 이혼하겠대.” “홧김에 한 말이겠지.” 도현우는 피식 웃었다. “네가 자기한테 더 신경 쓰기를 바라서 그런 말을 한 걸 거야. 게다가 오늘 너희 어머니랑 싸웠다면서? 잔뜩 화가 나 있을 텐데 지금 찾아간 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지.” 도현우는 한숨을 쉬었다. “너도 참... 너희 어머니 성격을 몰라서 그래? 왜 너희 어머니가 유나를 찾아가게 놔둔 거야? 이제 어떡할 거야? 고부 갈등은 답도 없는데 말이야.” 도현우는 말 몇 마디로 문제의 핵심을 교묘하게 고부 갈등으로 옮겼다. 고태준은 도현우의 말에 수긍하는 건지 조용해졌다. “유나한테 시간을 좀 줘. 혼자 밖에서 살면 돈도 없고 기댈 데도 없으니 며칠 못 갈 거야. 네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도현우의 말이 맞았다. 그동안 심유나는 너무 편히 살아서 고마운 줄 모르는 것이다. “알겠어.” 고태준은 담배를 끄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현우는 전화를 끊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휴대폰의 불빛만이 미소 띤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비출 뿐이었다. 갤러리를 클릭한 뒤 손가락으로 사진을 천천히 넘기던 도현우는 한 사진에서 멈췄다. 그건 꽤 오래된 사진이었고 화질도 좋지 않았다. 사진 속 여학생은 포니테일을 하고 교복을 입은 채 카메라를 향해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그건 학창 시절의 심유나였다. 귓가에서 그날 심유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했던 말이 들려왔다. “현우 오빠, 한 번 실패한 것뿐이잖아요. 내가 오빠처럼 똑똑했으면 아마 기분이 너무 좋아서 매일 웃으며 잠에서 깼을걸요.” 십여 년이 흘렀지만 소녀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팔을 붙잡았을 때의 그 감촉을 도현우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13살의 도현우는 처음으로 투자에 실패해서 6억 원에 달하는 손해를 봤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고 불리며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던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심지어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어서 손목을 그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는 참으로 유치했다. 만약 그때 심유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유치했던 그때 그 시절의 자신 때문에 지금의 그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도현우는 늘씬한 손가락으로 화면 속 소녀의 얼굴을 계속해 쓰다듬었다. “유나야, 너는 역시 바보 같아. 고태준처럼 오만한 놈을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야.” 도현우의 어두운 눈빛에는 집착과 애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가까이 들면서 사진 속 심유나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그곳에서 너를 꺼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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