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6년째, 심예원과 하은서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하도겸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던 그 밤, 하도겸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처음으로 딸을 품에 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올해 다섯 살이 된 하은서는 뜻밖의 포옹에 깔깔 웃으며 심예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아저씨가 비행기 태워줬어요!”
심예원은 애써 웃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하도겸은 술에 취해 있었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친딸 하은서에게도, 아내 심예원에게도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오늘 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 이유는 오직 하나, 오래도록 가슴에 묻어뒀던 첫사랑 소혜진이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6년 전, 하도겸은 소혜진과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소혜진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무작정 그녀를 뒤쫓던 하도겸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고 두 다리를 잃을 뻔했다.
그때 그의 곁을 지킨 건 심예원이었다. 수행비서로서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곁을 지키며 날이 선 말과 짜증을 견뎌냈고 무너진 그의 자존심을 다독이며 재활 훈련까지 함께했다.
힘겨운 재활 끝에 기적처럼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날, 하도겸은 술에 취한 채 심예원을 소혜진으로 착각했고 하룻밤 사이 대여섯 번이나 그녀를 거칠게 탐했다.
그날 밤 심예원은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하도겸은 별다른 반응 없이 결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심예원은 시간이 지나서야 이 결혼이 사랑 때문도 책임감 때문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해외에서 들려온 소혜진의 스캔들에 분노하고 상실감에 휩싸인 하도겸이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에 불과했다.
결혼 후의 하도겸은 그림자처럼 존재감을 감춘 채, 심예원과 딸의 삶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하은서가 태어난 날, 그는 굳이 외국 출장 일정을 잡아 자리를 피했고 옹알이를 시작하던 무렵엔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려 할 때마다 싸늘한 얼굴로 입을 막았다.
한 번은 하은서가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단지 ‘아빠’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피를 흘리는 아이를 차갑게 외면한 채 그대로 방치했었다.
...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술에 취한 하도겸의 눈빛은 낯설게도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는 품에 안았던 하은서를 소파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아빠가 되어줄 거야.”
“네! 은서는 아빠 믿어요!”
하은서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지만 하도겸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는 돌아서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유준아... 내가 꼭 좋은 아빠가 돼줄게...”
그 순간 심예원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유준이는 소혜진의 아들이잖아...’
하지만 하은서는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들뜬 얼굴로 심예원에게 달려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엄마, 아빠가 은서 사랑하는 거 맞죠? 앞으로는 아저씨 말고 아빠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아빠가 안아주면서 좋은 아빠가 되어주겠다고 했어요!”
하은서의 눈동자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하도겸의 품에 안겨 ‘아빠’라고 부르고 마음껏 애교도 부리는 날을 그토록 바라왔다.
심예원은 가슴이 시큰하게 저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몸을 낮춰 하은서를 끌어안았고 눈가엔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이의 희망을 깨뜨릴 수 없었기에 그 물음엔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잠깐 느끼는 이 행복조차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어떤 여자와 그 여자의 아이 덕분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하은서만큼은 이 잔인한 진실을 끝까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게 해주고 싶었다.
“은서야, 엄마랑 멀리 떠나면 어떨 것 같아?”
심예원은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눌러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갑자기 떠나야 해요? 엄마, 우린 가족이잖아요.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요...”
하은서의 입꼬리에 맺힌 웃음이 빠르게 무너졌고 당혹스러운 눈빛과 함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은서는 아빠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에요...”
심예원은 조용히 딸의 눈물을 닦아주며 숨을 고르고 말했다.
“아저씨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왔거든. 이제 우리가 그 자리를 내어줘야 해.”
“근데... 은서에게도 좋은 아빠가 되어준다고...”
하은서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 말이 진심이길 바라면서도 어쩌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엄마, 생일 지나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아빠한테 기회 한 번만 더 줘요. 아니... 마지막 기회 세 번만 더 줘요. 아빠가 진짜 우리를 더 좋아하는 거면 안 떠나도 되잖아요?”
심예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래. 은서가 정해. 엄마는 은서의 결정에 따를게.”
‘마지막 기회야. 도겸 씨가 마지막까지 우리를 외면한다면 그땐 정말 끝내는 거야.’
“엄마, 고마워요.”
“이제 자야지.”
하은서를 재운 뒤, 심예원은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하도겸의 결혼은 거의 껍데기만 남은 관계였다. 억지로 이어갈 이유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음 날 아침, 하도겸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걸 본 하은서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반갑게 달려갔다.
“아빠, 좋은 아침이에요!”
하지만 하도겸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
“너 방금 뭐라고 불렀어!”
하은서는 팔을 벌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금세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저씨...”
하은서는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아저씨... 죄송해요...”
심예원은 가슴 깊이 밀려드는 통증을 조용히 삼키고 하은서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은서야, 이리 와. 밥 먹자. 어린이집 늦겠어.”
그녀는 어젯밤 하도겸의 말과 행동은 술기운에 잠시 흐트러진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도겸은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식탁에 앉아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곤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섰다.
“아저씨,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하은서는 늘 그랬듯, 찬 바람이 쌩쌩 부는 하도겸의 등 뒤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학교에 가는 차 안에서 하은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채 창밖만 바라봤다.
어린이집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이 되어서야 고개를 들어 심예원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기회 한 번 준거로 해요... 이제부터 딱 세 번만 더 주자고요!”
하은서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심예원은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알겠어. 다 은서 말대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