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복수를 다짐하다
하지연은 자시에야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 문은 꽉 닫혀 있었고 문지기도 없었다. 하지연은 돌계단 위에 앉은 뒤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혔다.
그녀는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몸이 넝마가 된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문을 두드릴 힘조차 없었고 두드린다고 해도 아마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돌계단 위에 눕자 등 뒤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하지연은 고개를 들어 별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광활한 우주는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포용했지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생명은 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둘째 아씨, 큰아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밖에 계시는데 문을 열까요?”
문지기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혜원은 음험한 얼굴로 웃으면서 옆에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만 가자꾸나. 오늘 밖에서 하룻밤 자게 놔두거라.”
“아씨, 내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떡합니까?”
“뭘 걱정하느냐?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들 아는데 말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체면을 구겼다.”
하혜원은 그렇게 말한 뒤 먼저 떠났다.
하지연은 바닥에 누운 채로 안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었으나 화를 내거나 수치심을 느낄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누워 숨을 좀 돌리고 싶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할 것 없었다.
하지연은 목이 말랐다. 목이 타는 기분이 고통과 피로보다 훨씬 더 괴로웠다.
하지연은 목이 타는 기분을 견디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오늘 입궁할 것은 이미 예상했다. 덕양왕의 간질이 발작하기는 했지만 하지연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사실 하지연에게 행운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황후가 섭정왕과 그녀를 혼인시키겠다고 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오늘 덕양왕은 심하게 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심하게 발작하기 직전의 징조였다. 앞으로 덕양왕은 사흘 내로 다시 한번 발작하게 될 것이고 상황은 이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오늘 하지연이 어의에게 침을 쓰라고 건의한 이유는 황후에게 자신이 침술에 관해 알고 있고 덕양왕을 치료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덕양왕이 다시 발작하게 된다면 황후는 명령을 내려 그녀를 또 한 번 입궁시킬 것이다.
황후에게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인 걸 증명한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섭정왕이 끼어들어 그녀의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
정승 댁 사람들이 하지연을 죽이려고 한다면 황후가 그녀를 살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섭정왕이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면 누가 그녀를 살릴 수 있을까? 게다가 황후와 섭정왕 사이의 분위기를 봤을 때 섭정왕은 덕양왕을 매우 증오하는 듯했다. 만약 하지연이 덕양왕을 구한다면 섭정왕이 그녀를 살려두려고 할까?
오랫동안 꾸며왔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연은 지쳤으나 지금 무너질 수는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반드시 버텨야 했다.
잠기운이 몰려올 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빠르게 열렸고 탁탁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돌려 보니 땅에 물 한 그릇과 만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지연은 당황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문이 빠르게 닫혔다. 그러나 문틈 사이로 문지기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오늘 하지연은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손님 앞에서, 황후 앞에서 흘린 눈물은 계획을 위해 흘린 가짜 눈물이었다.
그러나 물 한 그릇과 만두 두 개를 보았을 때, 하지연은 일어나 앉아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진짜 눈물이었다.
문지기는 자신의 연민이 앞으로 그의 목숨을 살려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은 그의 인생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사실 문지기는 더 이상 저택에서 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권세 있는 자에게 빌붙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문지기는 2년의 계약 기간이 종료되면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연은 물을 마시고 만두를 먹은 뒤 그릇을 다시 문 앞에 놓았다.
배를 좀 채운 뒤에는 잠깐 쉬었고 조금 힘이 났다.
하지연은 저택의 대문이 아닌 오른쪽에 있는 뒷문으로 향했다. 담장이 아주 높았다. 하지연은 온 힘을 쥐어짜 내며 담장을 넘었다.
뒷마당에는 순찰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그곳은 청하원 일대로 그녀와 원씨의 처소가 있는 곳이라 그곳에 올 사람이 없었다.
정승 댁 맞은편의 높은 누각 안, 차가운 표정을 한 누군가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각의 가장 높은 곳에 서면 정승 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마마, 저 여인은 무공을 할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섭정왕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영아, 지금 당장 하지연을 조사하여 의술을 배운 적이 있는지 확인해 보거라.”
“의술 말입니까? 의술을 익힌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원씨 부인께서 의술을 익혔으니 말입니다.”
섭정왕은 원씨가 한때 유명했다는 걸 떠올렸다. 누군가는 그녀를 개국이래 가장 현명한 여인이라고 했다. 소문에 따르면 원씨는 악기, 서예, 회화에 능했고 의술, 점성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다재다능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하종수는 원씨가 아닌 첩인 영용부인을 더 아끼며 영용부인을 다재다능하다고 칭찬했다.
게다가 하종수는 그런 얘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여러 차례 했었다.
“그래. 원씨 부인은 의술을 익혔었지.”
섭정왕은 생각에 잠겼다. 밤바람이 휘휘 불면서 섭정왕의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그의 차갑던 표정이 서서히 따뜻해졌다.
“그렇다면 정말로 흠이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냐?”
“마마, 그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어의가 말했다시피 침술은 아주 위험한 방법입니다. 어의조차 자신 없어 하는데 아무리 의술을 익혔다고 해도 덕양왕 마마를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이영이 말했다.
섭정왕 독고용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용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 오늘 황후마마께서 마마를 혼인시키겠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저 여인과 혼인하실 생각입니까?”
“태후마마께서는 내 혼사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
독고용재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이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마,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제가...”
독고용재는 손짓을 하면서 섬뜩한 눈빛을 해 보이더니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우선은 움직이지 말거라. 명령이 떨어진 뒤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가 하지연과 혼인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하지연의 평판이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지연은 청하원으로 돌아갔다. 아직 잠이 들지 않았던 원씨는 인기척을 듣고 서둘러 시녀 소희에게 문을 열어 보라고 했다.
소희는 얼굴이 피투성이인 하지연을 보자 바로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하지연을 부축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원씨는 하지연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렸으나 참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원씨는 서글픈 눈빛으로 하지연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미안하구나. 전부 나 때문이다.”
하지연은 원씨를 살짝 밀어내면서 잔뜩 부은 원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원씨는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괜찮다.”
소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씨, 아씨께서 입궁하신 뒤 대부인께서 옥자 아주머니를 보내 마님의 따귀를 때렸습니다. 마님께서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지요.”
하지연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그 늙은이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씨는 본인의 상태는 신경 쓰지 않고 하지연이 몸을 씻을 수 있게 소희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직접 하지연의 상처를 씻겨주었다. 하지연의 손가락이 피투성이인 걸 보았을 때 원씨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하지연에게 오늘 궁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의 상처만 보아도 하지연이 오늘 어떤 일을 겪었을지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연은 원씨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저는 괜찮습니다. 덕양왕 마마께서 갑자기 발작하셨는데 제가 마마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후마마께 제가 침술을 할 줄 알고 마마를 구할 수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침술?”
원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 있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자신 있습니다.”
하지연이 확신하듯 말했다.
“그런 것 같구나.”
원씨는 하지연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황후마마께서 너에게 마마의 치료를 맡기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