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6화 다시 발작을 일으킨 덕양왕

하지연은 창백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하 정승 댁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그 웃음에는 노골적인 조롱이 섞여 있었다. “어찌하겠습니까. 정승 댁 적녀라고 해도 팔자를 거스를 힘이 없어 고작 이런 잔재주로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정작 그 화를 안겨준 자들이 제 혈육이라니 참 우스운 노릇이지요.” 하혜원은 싸늘한 눈빛으로 하지연을 노려보았다. “누굴 탓하겠느냐. 이 집에서 십육 년을 호의호식하며 살아오지 않았더냐. 혼사만 얌전히 따랐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그 말에 하지연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십육 년간 내가 누린 게 호의호식이라면 그간 네 년들이 내게 퍼부은 매질과 모욕은 대체 뭐란 말이냐!” 절절한 하소연이었으나 자리에 모인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흔들리지 않았다. 친부 하 정승마저 미움 어린 눈길로 딸을 노려볼 뿐이었고 할머니인 정승 댁 대부인 또한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하혜원은 비웃듯 코웃음을 흘렸다. “매질이라니? 감사할 줄 모르는 네 탓이지. 어머니께서 정말 너만 홀대하셨겠니? 이 집에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었으면 그걸로 족한 줄 알아야지.” “족한 줄 알아야 한다라... 당신들 같은 인간들을 가족이라 믿었던 하지연이 어리석었던 거지. 그래, 그게 이 몸이 짊어질 팔자라면 웃으며 받아들이겠다.” 그 말에는 또 다른 뜻이 담겨 있었으나 그 자리의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연은 영용부인이 내미는 술잔을 고요히 받아 들었다. 겉으로는 맑은 물 같이 보였으나 그 속에 든 것은 극독으로 이름난 ‘진독’이었다. 입술에 닿는 순간 곧 숨통을 조여오는 사약 같은 독약이었다. 하지연은 이미 현대에서 양석현 교수에게서 한의학을 배웠고 세계 최정상급 킬러로 불리는 ‘블랙스완’을 도우며 수많은 독을 다뤄 본 적이 있었기에 단번에 잔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아차렸다. 다행히 그녀의 손에는 ‘탈혼환’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반지가 있었다. ‘탈혼환’은 독기를 온전히 없애지는 못하나 그 기운을 흐트러뜨려 치명상을 막을 수는 있었다. 술을 입에 대는 순간 중독은 면치 못하나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한편, 궁중에서는 덕양왕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혼약이 파기된 수치 탓에 체면을 잃은 덕양왕은 차마 덕양 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궁에 머무는 처지였다. 사흘 동안의 요양 끝에 병세는 차츰 가라앉는 듯 보였다. 둘째 날까지만 해도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으나 어의가 올린 약을 복용한 뒤로는 통증이 한결 덜해졌다. 다만 걸음을 옮길 적마다 어지럼이 남아 몸을 제대로 가누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황후는 기운이 쇠한 덕양왕의 마음을 달래고자 그를 데리고 어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덕양왕은 절룩거리는 발을 이끌며 정원을 거닐었으나 얼굴에는 여전히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덕양왕은 속으로 자책을 삼켰다. ‘참으로 한심하구나. 하지연 따위의 계집조차 나를 가벼이 여겼으니 백성들은 나를 얼마나 하잘것없는 황실 친왕으로 여기겠는가.’ “흠아, 괘념치 말거라. 하지연 같은 천한 계집이 어찌 네 짝이 될 자격이 있겠느냐. 이 어미가 반드시 문벌 높은 규수를 택해 네 배필로 들일 것이다. 그 계집보다 백 배는 더 나은 인연을 맺어주마.” “어마마마...” 덕양왕의 눈빛은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부디 이후로는 혼사 이야기를 다시는 꺼내지 마시옵소서. 그 누구와도 더는 인연을 맺고 싶지 않사옵니다.” 그 말에 황후는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을 누르지 못했다. ‘모든 화가 하지연이라는 계집에게서 비롯되었다. 혼약을 물리지 않았다면 우리 덕양왕이 어찌 이 지경으로 기개가 꺾이고 초라해졌으랴.’ 그때 차라리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 것이야말로 뼈에 사무치는 후회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일거양득으로 속 시원한 일이기도 했다. ‘독고용재와 하지연 저 계집을 한데 엮어버리니 속이 다 후련하구나.’ 그때 하지연이 내뱉었던 괴이한 침술이 불현듯 황후의 뇌리를 스쳤다. 의심스레 여겨 어의원 원판을 불러 물었으나 그의 대답은 실로 괴이하였다. 하지연이 말한 그 침술은 민간에서는 보기조차 드문 술법으로 궁중의 어의라 하여도 극히 일부만이 간혹 다룬다고 하였다. 이론상 가능하지만 바늘이 털끝만치 어긋나도 곧 목숨이 끊어질 만큼 위험천만하다 하였다. ‘그 계집의 말을 잠시라도 믿으려 했다니!’ 황후는 치욕과 분노에 잠식되어 몸서리를 쳤다. “그깟 몰염치한 계집 하나 때문에 이리 망신창이가 되다니, 형님께서 과연 황실의 친왕이 맞으시오? 체통이 있기는 하오?” 태자가 자갈길을 밟으며 비웃듯 다가왔다. 덕양왕은 눈을 치켜뜨며 싸늘히 쏘아붙였다. “태자 전하,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친히 본왕을 조롱하러 온 것이옵니까?” 태자는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을 흘렸다. “형님,이 태자의 말을 서운히 듣지 마시오. 하지연 같은 천한 계집은 노리개처럼 내던진다 한들 눈길조차 줄 바 아니오. 세상에 고귀한 규수는 차고 넘치거늘, 어찌 그따위 계집에게 마음을 쓰시겠소?” 덕양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전하, 본왕이 언제 그 계집 때문에 속을 태운다고 하였사옵니까?” 태자는 덕양왕의 아픈 구석을 쑤셨다. “그렇다면 형님은 어찌 궁 안에만 웅크리고 계시오? 그깟 혼약 파기가 무슨 대수란 말이오? 본디 형님을 몰라본 것은 그 계집의 무지일 뿐인데, 어찌 스스로를 이리도 초라하게 만들고 계시느냐는 말이오!” 덕양왕은 미간을 좁히며 언성을 높였다. “도리어 본왕이 묻겠사옵니다. 전하께서는 하혜원 아씨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신 바 있지 않으시옵니까? 본디 하 정승은 혜원을 본왕의 배필로 삼고자 하였사오나, 말을 바꾸어 적녀인 하지연이 본왕을 사모한다고 하여 적녀의 체면을 앞세우며 혼처를 바꿔 들였사옵니다. 돌이켜 보니 그 뒤에 전하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니옵니까? 전하께서 혜원 아씨와 정분을 통하신 뒤 하지연을 본왕의 배필로 내몬 것 아니옵본왕이 본왕이 이 지경으로 천하의 조롱거리가 된 것, 그 모든 근원이 전하께 있지 않사옵니까!” 허물이 드러나자 태자는 수치와 분노가 뒤엉켜 얼굴이 순식간에 굳더니 곧 노기를 터뜨렸다. “허튼 망발 마시오! 본궁은 혜원 낭자와 몇 번 스치듯 마주했을 뿐이오. 무슨 정분이 있단 말이오? 형님은 그 계집의 궤변만 곧이곧대로 믿고 있구려. 하지연이 형님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한 것이 분명한데 아직도 눈감고 귀 닫아 그 계집만 감싸시겠소? 형님은 다리만 다친 게 아니오. 이성마저 잃으셨구려. 이리도 나약하니 폐물이라 손가락질받는 게 아니겠소!” “그만두거라!”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노성을 질렀다. 얼굴은 서릿발처럼 굳었고 속은 타들어 갔다. ‘팔자가 어찌 이리도 고단하단 말인가. 황후라 하여 천하의 어미라 불리건만 두 아들이 서로 등을 지고 다투니 피가 거꾸로 솟는구나. 깨물어 아프지 않을 손가락이 없거늘!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감싸랴...’ 두 형제는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마주 앉기만 하면 말다툼이 격해져 끝내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후는 속으로 그 까닭을 짐작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두 아들을 두고 누구 한쪽만 편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자는 황후의 노기가 치밀자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마마마, 형님만 두둔하시니 소자는 더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다만 저러다간 머잖아 폐 왕자가 되실까 두렵사옵니다.” 태자는 말을 마치고 발길을 돌렸다. 덕양왕은 분노와 수치에 가슴이 뒤틀리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내 숨이 막히는 듯 답답해져 은행나무에 몸을 기댔으나 이내 두 다리가 풀리며 온몸이 떨려왔다. “흠아, 어찌 된 게냐!” 황후가 얼굴빛을 잃으며 달려와 부르짖었다. “태자! 서둘러 어의를 불러오너라!” 태자가 돌아봤을 때 덕양왕은 이미 땅바닥에 쓰러져 사지가 떨리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태자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혀를 찼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는 냉랭히 한참을 지켜보다가 궁녀와 내관들이 허둥지둥 달려드는 것을 본 뒤에야 마지못해 명을 내렸다. “어의를 불러오라!” 어의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덕양왕의 기운이 위태로웠다. 궁녀와 내관들은 발작을 일으킨 덕양왕을 보며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누구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황후는 다급한 나머지 태도에 서툴러 내관에게 왕의 입에 손을 억지로 넣게 해 혀를 물지 않게 하였고 또 사지를 강제로 펴라 명하였다. 그러나 하지연이 경고했던 말을 까맣게 잊은 탓에 덕양왕의 팔다리는 골절되고 말았다. 쏟아지는 침과 거품은 제때 배출되지 못해 기도를 막았고 호흡이 가빠지던 덕양왕의 얼굴은 순식간에 검게 질려 갔다. 이윽고 목뼈까지 부러져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뒤늦게 달려온 어의는 이미 의식이 끊어져 가는 덕양왕을 보고 놀라서 급히 응급처치를 시도했다. 간신히 한 줄기 숨을 붙잡아놓기는 했으나 상태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덕양왕은 황후의 거처로 옮겨졌으나 목뼈 골절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 탓에 호흡이 어려웠고 상처는 치명적으로 번져갔다. “황후마마, 덕양왕 마마의 병세가 극히 위중하옵니다...” 어의는 입술을 달달 떨며 차마 그다음을 입에 올리지 못하였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