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침술로 혈맥을 봉하다
하혜원의 손짓에 두 명의 하인이 앞으로 나와 소희를 거칠게 끌어냈다.
소희의 꽃 같은 얼굴은 삽시간에 핏기가 가셔 창백히 질렸다.
‘아씨조차 영용부인의 손에 당하셨는데 내가 어찌 무사할 수 있으랴.’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으나 아직 어린 계집아이에 불과했던 소희는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끌려갔다. 그러나 끝내 눈물은 보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공포를 견뎌냈다.
하지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앞이 아득히 일렁였다. 독기가 혈맥을 타고 번져 하반신이 점점 저릿하게 굳어갔다.
그때 소희가 끝까지 울음을 삼키며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하였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상을 내려 이 아이의 충심을 기리리라.’
잠시 뒤, 두 사람은 지하 옥방에 내던져졌다.
옥자가 비웃음을 흘리며 뒤돌아 말했다.
“아씨,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던지고는 머슴들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소희는 기어와 하지연을 부축하며 울먹였다.
“아씨, 괜찮으십니까?”
하지연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곧 하혜원과 영용부인이 들이닥칠 텐데. 그 전에 독을 잡지 못한다면 황후마마가 보낸 전갈이 미처 도착한다고 하여도 덕양왕의 병을 치료하는 불가능해. 덕양왕의 간질이 발작을 일으켜야만 내게 마지막 기회가 올 거야. 이마저 놓치면 남은 길은 도망뿐인데... 해보지도 않고 물러날 수는 없지!’
하지연은 이를 악물며 속삭였다.
“어서 내 소매 속에서 침통을 꺼내거라.”
소희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곧장 하지연의 말을 따랐다. 비단 속에 감춰둔 작은 침통을 꺼내어 하지연 앞에 내밀었다.
“침을 꺼내거라!”
하지연의 숨결은 가빠지고 맥박은 거세게 요동쳤다. 그리고 얼굴은 이미 창백하였다.
“예... 아씨!”
소희는 덜덜 떠는 손으로 침통에서 침을 꺼냈다.
“아씨,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하지연은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떨리는 손으로 침을 집어 들고 주요 혈 자리 네 곳에 빠르게 침을 놓아 독기를 한쪽 다리로 몰아냈다.
‘걸음은 불편해지겠으나 독이 온몸에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통증을 견뎠지만 남은 독기가 신경을 갉아 먹는 탓에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소희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하지연의 얼굴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아씨,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하지연은 소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탈혼환을 움켜쥐었다. 은은히 빛을 내는 탈혼환에서 전율이 방출되었다. 그녀는 그 기운을 모아 독이 몰린 다리에 흘려보냈다.
그러나 독을 곧바로 씻어내진 못하였다. 일주일, 아니 열흘은 걸릴 터였다. 그 사이 해독제를 복용하며 서서히 독기를 없애야만 하였다.
하지연이 침을 놓고 숨을 고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바깥에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예상대로 영용부인과 하혜원이었다.
그들은 억센 인상의 노파 둘을 거느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 한 노파는 며칠 전 장신루 앞에서 무릎 꿇고 있던 하지연을 감시하던 자였다. 그날 하지연에게 뺨을 얻어맞은 원한을 품었던 노파는 영용부인의 지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따라온 것이었다.
그 노파는 오래도록 하 정승 댁 대부인의 신임을 받아왔던 터라 하지연 같은 어린 계집아이에게 수모를 당한 분노를 견딜 수 없었던 터였다.
지하 옥방의 문이 열리자, 노파는 영용부인의 지시도 기다리지 않고 와락 달려들어 하지연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문턱 앞으로 질질 끌어내며 호통쳤다.
“무릎을 꿇어라! 부인께서 네년을 꾸짖으시겠다 하지 않느냐!”
그 순간 소희가 비명을 지르듯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놓으시오! 우리 아씨를 놓아주시오!”
어디서 그리 힘이 솟았는지 소희는 노파의 손목을 그대로 물어뜯었다. 어린 몸으로 온 힘을 다해 물자 이빨이 깊이 파고들었고 그 자국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소희의 눈빛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했다. 오랫동안 삼켜온 굴욕과 공포가 마지막 순간에 폭발하자 눈빛에 서슬이 번뜩였다. 더는 위축된 시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비명을 지른 노파 곁으로 다른 노파가 달려와 소희의 몸을 발로 거칠게 걷어찼다.
그 발길질에 맞은 소희는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면서도 끝까지 노파의 팔을 물고 놓지 않았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몸은 떨렸으나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세게 이를 악물었다.
그 틈을 타 하지연은 숨을 고르고 머리의 비녀를 뽑아 들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채 몸을 날려 소희를 짓밟던 노파의 허벅지에 곧장 꽂아 넣었다.
“꺄악!”
비명과 함께 노파는 바닥에 나자빠졌고 비녀가 박힌 자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영용부인은 눈을 크게 뜨며 속으로 경악했다.
‘분명 독이 든 술을 마셨거늘, 어찌 이리 멀쩡히 반격한단 말이냐?’
그러나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연은 이미 두 노파를 제압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살기 서린 낯빛으로 영용부인에게 다가갔다.
죽어가는 하지연을 마지막으로 짓밟고 분풀이하려고 가장 독하고 잔인한 노파 둘을 데려왔건만 뜻밖에도 순식간에 당하고 만 것이었다.
영용부인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눈앞의 하지연은 이미 짐승과도 같은 섬뜩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도 이리 날뛰느냐!”
영용부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으나, 그 속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하지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진영용, 죽을 때가 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네 년이다! 네년이 진칠복과 함께 꾸며온 그 추악한 음모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줄 아는 게냐?”
영용부인의 낯빛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변하였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미친 듯 소리쳤다.
“네년이 무슨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하지연은 본래 추측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영용부인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확신을 얻고 입꼬리를 비죽이 올리며 냉소를 흘렸다.
“허튼소리라 하였느냐? 과부로 지내던 시절 진칠복과 정을 통하고 아이까지 가졌으면서 온갖 술수를 부려 정승 댁에 시집온 것이 아니더냐.”
그녀의 시선이 하혜원에게로 옮겨졌다.
“네가 정말 하 정승의 딸이라 믿느냐? 천만에! 네 아비는 진칠복, 저잣거리 협잡배에 지나지 않는다!”
하혜원은 분개하여 목청껏 외쳤다.
“그런 말을 누가 믿는다고 생각하느냐! 천벌 받을 거짓말은 염라전에 가서나 떠들 거라!”
하지연은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믿지 못하겠거든 네 어미에게 직접 물어보아라.”
말을 쏟아낸 뒤 가슴이 답답하고 피가 치밀었으나 하지연은 꾹 참으며 태연한 척 가장했다.
영용부인의 눈동자에는 놀람과 분노가 뒤섞이더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몽둥이로 쳐 죽일 년! 거기 누구 없느냐, 몽둥이를 내오너라!”
하지연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역시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혜원과 하우림에게서 하 정승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어. 핏줄이 아니었던 것이지.’
그녀는 독이 퍼진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 머리칼이 풀려 어깨 위로 흩날리고 스산한 바람이 스며들어 흩날리자 그 모습은 마치 원한에 사무친 원귀와도 같았다. 눈빛은 음산하고 서늘하였다.
겁에 질린 영용부인은 뒷걸음질 치며 외쳤다.
“거기 누구 없느냐! 어서 이년을 잡아라!”
문밖에서 대기하던 하인 둘이 급히 뛰어들자, 영용부인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하지연을 가리키며 명하였다.
“저년을 당장 끌어내어 몽둥이로 쳐 죽여라!”
두 하인은 잠시 눈치를 보았다.
하지연의 살기 어린 눈빛에 뒷걸음질 치자 하혜원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붙잡아라!”
어쩔 수 없이 두 하인이 팔을 붙들려는 순간 하지연은 마지막 기운을 짜내 몸을 날렸다. 영용부인을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뜨리며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독기는 예상보다 더 빠르게 몸을 갉아 먹고 있었다. 그러나 하지연은 물러설 수 없었다.
‘이 순간을 넘기지 못한다면 황후마마가 보낸 전갈이 도착한다고 하여도 나는 궁에 발붙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