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그들이 결혼했을 때 그녀는 22살, 신도현은 32살이었다.
그는 나이만 많은 게 아니었다. 다른 곳은 더욱 거대했다.
결혼 생활 3년, 그는 지독할 만큼 다정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별이든 달이든 기꺼이 따다 바쳤고 보석처럼 아끼고 또 아꼈다. 밤마다 집요하게 그녀를 탐하는 것만 빼면 완벽했다. 그녀가 울며 애원해도 그는 낮은 미소와 함께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믿었다. 그 남자의 헤아릴 수 없는 부와 사랑이 전부 자신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바로 그날, 그 믿음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에게 걸었던 수많은 전화가 단 한 통도 연결되지 못한 채, 모조리 거절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곧이어 절친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하린아, 이 남자 네 남편 아니야? 파리에서 어떤 여자랑 진하게 포옹하고 있던데.]
사진 속 남녀를 확인한 순간, 그녀의 세상은 얼어붙었다.
남자는 신도현, 그리고 여자는 그녀의 이모였다.
...
조영만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신도현이 집에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붉게 짓무른 눈으로 소파에 넋 놓고 앉아 있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녀린 조하린의 모습이었다.
솟구치는 죄책감에 그는 서둘러 다가가 그녀의 여린 몸을 품에 가뒀다.
“하린아, 갑자기 파리에 회의가 잡혔었어. 시차 때문에 네 전화를 못 받아서 장례식에도 못 가고... 정말 미안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그걸로라도 보상하게 해줘.”
조하린은 잔물결 하나 없는 수면 같은 표정으로 그의 변명을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방에서 서류 두 개를 꺼내 마지막 장을 펼쳐 그에게 내밀었다.
“아저씨, 저 이거 두 개 갖고 싶어요. 사인해요.”
신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곧장 펜을 들어 제 이름을 썼다.
그 거침없는 행동에 조하린의 눈가가 붉어졌다.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엄청 비싼 걸 달라고 할까 봐 무섭지도 않아요?”
신도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하린아, 우리는 부부야. 내 모든 것은 당연히 네 것이고 곧 태어날 우리 아기 것이기도 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괜찮아.”
그러면서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배에 귀를 댔다.
“오늘 정기 검진 있는 날 맞지? 아기가 힘들게 하진 않았어? 내가 같이 가줄게.”
조하린은 침묵했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신도현은 그녀가 허락했다고 멋대로 판단하고 차에 태웠다.
차가 달리는 내내, 차 안은 숨 막히는 침묵만이 흘렀다.
신도현이 어색한 침묵을 깨려던 찰나, 요란하게 휴대폰 벨이 울렸다.
“도현아, 나 귀국했어. 우리 얘기 좀 해.”
가까운 거리 탓에 조하린은 전화기 너머의 강지유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고 이내 신도현이 전화를 끊는 것을 보았다.
“하린아,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산부인과에 혼자 다녀올 수 있을까?”
조하린은 그의 거짓말을 굳이 들추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
을씨년스러운 바람 속에서 택시를 잡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 위로 과거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몇 년 전, 조하린은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구경꾼들은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어 외면했고 핏물에 잠겨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영화처럼 나타나 그녀를 안아 든 사람이 바로 신도현이었다.
그날 그녀는 자신보다 열 살은 많은 그 남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반해버렸다.
운이 좋게도 어른스럽고 다정한 신도현 또한 그녀를 사랑해주었다.
그렇게 1년간의 연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다. 나이가 많아서일까, 그의 인내심은 끝이 없는 듯했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고 기념일이나 선물도 잊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폈지만 오직 침대 위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이미 서른 줄에 들어선 그의 체력이 왜 이리도 좋은지, 매일 밤 그에게 안겨 울먹이며 제발 그만해달라고 빌다시피 매달릴 때면 그는 그저 웃으며 그녀의 눈물 젖은 입술을 거듭 탐할 뿐이었다.
“바보야, 널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많이 사랑해야 우리에게 아기 천사가 찾아오는 거야.”
그의 다정한 속삭임에 그녀의 배는 매일 밤 희망으로 부풀었고 결혼 3년 차에 드디어 새 생명을 품게 되었다.
사흘 전, 아버지 조영만이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황급히 달려간 그녀는 아버지가 계속해서 신도현의 이름을 되뇌는 것을 들었다. 사위 얼굴 한번 보고 싶다며 그가 언제 오는지 계속 묻고 또 물었던 것이다.
모두가 그가 임종 직전 딸을 신도현에게 맡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는 연락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하린의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도 그의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조영만은 그렇게 깊은 회한을 품은 채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의 장례를 모두 치른 직후, 친구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하기 전까지 조하린은 그저 신도현이 바쁜 줄로만 알았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왜 이모와 껴안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녀는 신도현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서재로 들어갈 용기를 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마치 얼음굴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곳은 온통 그녀의 이모와 관련된 물건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벽을 가득 채운 사진, 소중히 보관된 연애편지, 전해주지 못한 수많은 선물, 그리고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 두꺼운 연애 일기까지...
조하린은 그 일기장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평생 단 두 번의 연애를 했다.
한 명은 그녀였고 다른 한 명은 바로 그녀의 이모, 강지유였다.
두 사람은 캠퍼스 커플이었고 무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가장 사랑할 때, 그는 그녀와 함께 대서양을 건넜고 아마존 정글을 탐험했으며 황금빛으로 물든 설산 아래서 그녀를 끌어안고 뜨겁게 입 맞췄다.
가장 증오할 때, 그는 그녀 때문에 수백억짜리 주얼리를 깨부쉈고 이별 후에는 자존심을 버린 채 외국까지 쫓아가 매달렸으며 심지어 그녀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위출혈이 생길 때까지 매일같이 술에 절어 살았다.
그의 지난 반생의 모든 희로애락은 전부 강지유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과 함께한 이유는 놀랍게도 강지유와 헤어진 후 그녀를 닮은 대역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조카에게 접근했다. 그녀의 얼굴이 이모와 소름 끼치도록 닮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뺑소니 사고를 계획해 그녀가 자신에게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고 아이를 갖게 하려고 밤낮으로 그녀의 몸을 탐했다.
하지만 그가 원했던 건 그녀의 아이가 아니라 강지유를 닮은 아이였다.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조하린은 벼락을 맞은 듯 무너져 내렸다.
다정함도 가짜, 사랑도 가짜, 진심마저도 전부 가짜였다.
그는 그녀를 철저하게 속여왔다.
그녀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새로운 사람을 들이려면 먼저 마음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누구의 대체품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하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조하린이었다.
하지만 첫 만남부터 그는 그녀를 속였다.
그러니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그녀 역시 그를 한 번 속여주기로 했다.
그녀는 방금 전 그가 서명한 서류가 이혼 합의서와 낙태 수술 동의서임을 구태여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의 대용품도 아니며 마음속에 자신을 담지 않은 남자는 그녀에겐 더 이상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조하린은 병원으로 들어가 곧장 낙태 수술 동의서를 담당 의사에게 건넸다.
“선생님, 이 아이를 지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