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혹시라도 더 보고 있다가 자신이 참지 못하고 이 두 남녀의 뺨을 후려칠까 봐 송해인은 아무 말 없이 선글라스를 쓰고 돌아서서 나갔다.
룸 안,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윤시진은 사람들의 장난에 얼굴이 빨개진 임지영을 힐끔 보고는 기분이 씁쓸해져 술을 들이켰다.
빈 잔을 내려놓는 순간, 문밖에서 스쳐 지나가는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자 윤시진은 멈칫했다. 어쩐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만해, 진희야.”
한은찬은 임지영의 손등에 올려져 있는 딸 한진희의 손을 떼어내고는 안아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에 들어가서 오빠랑 놀아.”
그러기 싫어서 한진희는 입을 삐죽였다.
임지영은 아이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고 한진희를 달래줬다.
“진희야, 엄마...”
그러다가 한은찬의 눈치를 보고 말을 바꿨다.
“이모가 같이 가줄까?”
한진희는 임지영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편이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시진은 임지영이 아이를 안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은찬의 옆으로 갔다.
“은찬아, 송해인 씨는 지금 어떤 상태야? 아직 의식이 안 돌아왔어?”
윤시진은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한은찬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동작을 멈추더니 한 박자 뒤에 대답했다.
“어제 깼어.”
그 말에 윤시진은 멍해졌고 이내 다시 한번 문밖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아까 본 그 여자가 정말...’
“그럼 송해인 씨는...”
윤시진이 말하려는데 한은찬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지금 앞을 못 봐. 언제 회복할지 모르고. 해인이가 자존심이 세서 나도 해인이가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깨어났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
‘앞을 못 본다고? 그럼 조금 전에 문 앞에 서서 엿보고 있던 여자가 송해인 씨는 아니겠네.’
사람을 잘못 봤나 싶어 윤시진은 묻고 싶던 말을 삼켰다.
한은찬은 다시 휴대폰을 봤는데 두 시간 전에 유현숙이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
[대표님, 누군가가 사모님을 차에 태우고 갔어요!]
차 번호판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한은찬은 단번에 그 차가 정채영의 차인 것을 알아봤다.
놀랍지는 않았다. 송해인에게는 그가 전부였고 그 외에 친구가 오직 정채영 한 명뿐이니까.
정채영은 성격이 거칠고 화가 많았다. 게다가 정씨 가문은 이미 오래전에 몰락했고 한은찬은 늘 정채영을 못마땅해했다.
송해인 역시 눈치가 빨라서 사적으로 정채영과 연락을 주고받고 친하게 지내더라도 그의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정채영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미리 말하지 않고 몰래 나간 건 아마 그가 기분 나빠할까 봐 그랬을 것이다.
한은찬은 우쭐해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항상 송해인의 마음을 꿰뚫어 봤다.
한은찬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따뜻한 조명이 비추는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온화해 보이고 고급스럽지만 눈빛만은 한없이 차가웠다.
송해인은 참 괜찮았다. 아내로서도, 업무 파트너로서도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너무 훤히 보이는 이 여자는 밍밍한 물 같았다.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계속 마시자니 맛이 없다...
...
한편.
“에취!”
송해인이 크게 재채기했다.
눈앞의 갈라진 복도를 보자 그녀는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퓨처 레스토랑은 5년 사이에 딱 한 번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서 크기가 훨씬 넓어졌다.
송해인은 원래 가던 길로 그냥 돌아가려 했는데 생각이 다른 데 팔렸다가 길을 잃어버렸다. 벽이나 바닥의 표지판을 찾으며 걷던 그녀는 갑자기 모퉁이에서 나온 남자와 부딪힐 뻔했다.
“X발, 눈깔이 없냐!”
욕설을 내뱉은 남자는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고 뱃살이 불룩 나온 데다가 목에 엄지손가락만 한 금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딱 봐도 돈 좀 벌었다고 설치는 졸부였다.
역겨운 술 냄새가 확 풍기자 송해인은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숙인 채 시각 장애인용 지팡이로 길을 더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못 봐서...”
그 말에 남자는 오히려 신이 났다.
“오호, 진짜 앞이 안 보이나 보네?”
송해인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 남자의 넓적하고 군살이 잔뜩 낀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코안으로 스며드는 술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헤헤, 그래도 꽤 예쁘네. 오빠가 의사인데 네 눈 좀 고쳐줄까?”
“비켜요!”
송해인이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전혀 겁먹지 않았고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 오빠라고 부르면 보내줄게. 어때?”
화를 억누르고 있던 송해인은 그가 딱 걸렸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화풀이할 생각이었다.
벽에 달린 CCTV를 흘깃 본 송해인은 일부러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 의사 맞아요? 가까이 오지 마요. 무섭단 말이에요...”
그녀는 말하면서 한 걸음씩 물러나며 CCTV 사각지대로 남자를 유도했다.
그러자 남자는 더 흥분한 듯 손을 비비며 송해인을 구석까지 몰았다.
“겁먹지 마. 오빠랑 룸에 가자. 내가 오늘 밤에 눈을 제대로 치료해 줄게!”
그 순간, 송해인의 눈빛이 더 싸늘해졌고 그녀는 지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단 한 방이면 이 돼지 같은 인간을 마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거기를 걷어차면 된다.
남자의 손이 뻗어오는 순간, 송해인도 손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한 사람이 그의 손목을 확 꺾어버렸다.
“아악!”
뚱뚱한 남자는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렀고 송해인은 눈이 동그래졌다.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그 남자는 서른 언저리쯤 되어 보였고 깔끔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송해인은 그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님을 바로 알았다.
함영민은 뚱뚱한 남자의 뒤통수를 잡고 그대로 벽에 처박았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손님, 취했으면 방으로 돌아가서 주무시죠.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뚱뚱한 남자는 이제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그가 도망치려는 순간 묘하게 웃는 듯한, 그러나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그렇게 쉽게 가려고?”
‘이 목소리...’
송해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몇 미터 앞에서 늘씬하고 곧은 체형의 배도현이 걸어오고 있었다. 복도의 희뿌연 조명이 선글라스를 통해 보면 딱 노을빛처럼 보였다. 그래서 배도현은 마치 황혼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같았다.
그 순간, 송해인의 머릿속에 칠 년 전 공항의 그 장면이 떠올랐고 칠 년 전의 배도현과 지금 눈앞의 이 남자가 겹쳐 보였다.
“송해인, 꼭 그렇게 해야겠어?”
기억 깊은 곳에서 들려온 그 한마디가 송해인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칠 년이나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