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그렇게 신채이가 립스틱을 정리하고 화장실을 나서려던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박한섭이 신소은을 벽에 밀어붙인 채 깊게 키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긴 손가락이 신소은의 머릿결 사이로 파고들고 다른 한 손은 마치 그녀를 자신의 뼈에 새겨 넣으려는 듯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신소은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흰 목선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박한섭의 품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박한섭은 한참 만에야 신소은을 놓아주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살짝 부은 입술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물었다.
“만족했어?”
그러자 신소은은 박한섭의 품에 기대 어딘가 나른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섭 씨, 나 너무 욕심쟁이 같지 않아? 이미 박씨 가문 가보까지 받았으면서... 또 키스까지 바랐잖아. 언니가 보면 또 마음 아프겠지?”
그녀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냥... 너무 괴로웠어. 그 일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원래 함께였을 텐데...”
박한섭은 잔잔한 눈빛을 한 채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 사람이 아픈지 어떤지, 나와는 아무 상관없어. 난 애초에 그 사람을 좋아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좋아할 일 없을 거니까. 내가 좋아한 사람은... 늘 너였어, 소은아.”
그 말과 함께 박한섭은 다시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그리고 신채이는 그대로 굳어 선 채,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숨이 막힐 만큼 아팠던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생각했다.
‘이건, 예전 저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이 남긴 마지막 잔열이겠지. 이 뜨거운 감정이 다 식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박한섭과 신소은은 무려 3분이나 키스했고 그들이 떠나고 난 뒤에야 신채이는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찢어진 마음을 달래듯 드레스를 고쳐 입은 뒤, 파티장으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신소은이 달려와 신채이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언니, 그 반지... 원하면 내가 줄 수도 있는데 훔치긴 왜 훔쳐?”
신채이는 눈을 깜빡였다.
“뭘 훔쳐?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모른 척하는 거야?”
신소은의 눈이 금세 붉어졌다.
“잠깐 화장실 갔다 왔을 뿐인데 반지가 사라졌어. 그리고 웨이터가 말하더라. 내 가방 근처에 간 사람이 언니뿐이라고!”
소리만 듣고 뛰어온 신정훈과 김혜선은 아무 말도 묻지 않은 채 곧장 신채이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신채이! 넌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면 입에 가시 돋니?!”
얼굴이 타들어 가듯 아팠다.
아직 놀란 탓에 신채이가 말도 못 꺼내는데 김혜선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여기! 당장 이년 몸수색해요!”
그러자 웨이터 몇 명이 즉시 달려들어 거칠게 신채이의 드레스를 잡아당겼다.
“나 안 훔쳤어요! 그만 해요! 이거 놓으라고요!”
“촤악!”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리며 신채이의 어깨가 드러났고 주변에서는 놀란 듯한 숨소리와 비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찾았습니다!”
웨이터 한 명이 그녀의 가방에서 그 비취반지를 꺼내 들었다.
“역시 여기 있었네!”
신소은은 반지를 받아 들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언니... 이제 뭐라고 할 거야?”
신채이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해명하려 입을 열려던 그 순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갈라섰다.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와 신채이가 고개를 들어보니 박한섭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윤이 나도록 반짝이는 구두가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신채이의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걸 왜 훔쳤어?”
낮은 목소리였지만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멈췄다.
“난 널 내 아내로 생각한 적 없어. 네가 그걸 모를 리 없잖아.”
신채이는 고개를 들어 박한섭의 차갑고, 잔혹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신채이.”
박한섭의 얇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이 묻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이 세상에는 네 것이 아닌 것들이 있어. 그리고 그건 영원히 네 것이 될 수 없어.”
이에 신채이가 문득 웃었고 그 웃음에 박한섭은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울고 소리 지르고 절망하는 모습은 수없이 봤으나 지금 같은 웃음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치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그리고 어딘가 조롱이 섞인 웃음이었다.
“나 안 훔쳤어.”
목소리는 작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흐트러짐 하나 없이 똑바로 말했다.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 빛에 반사되어 그녀의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은 것 같기도, 별빛을 담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