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임다영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눈을 부릅떴다.
설마 이곳에서 하려는 건...
바로 그때,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연시윤의 얼굴을 보며 임다영은 황급히 해명했다.
“내 핸드폰 아니에요.”
연시윤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고 그가 돌아서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표님.”
정민은 지금 자신의 전화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방해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가 공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육 도련님 쪽에서 회답이 왔습니다. 대표님을 찾아뵙고 프로젝트의 세부 사항에 대해 얘기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육민우?”
연시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시간에?”
정민은 마침내 무언가를 알아채고 조심스럽게 그를 떠보았다.
“그럼 언제가 좋으실지...”
심호흡을 하던 연시윤은 이마를 문질렀다. 육민우는 사업 파트너 중에서 가장 이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에는 또 어디로 도망갈지 모른다.
“알았어. 이쪽으로 오라고 해.”
전화를 끊은 연시윤은 임다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그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 임다영은 초조해하며 급히 그의 소매를 잡았다.
“뭐야?”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데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임다영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런 난 어떡해요?”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10억 2천만 원이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아래층에서 잠깐 미팅이 있어. 어디 가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제야 안심이 된 임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얌전하게 자신의 소매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내 임다영의 손을 뿌리쳤다.
“이렇게 함부로 만지지 마. 주제 파악하라는 말이야. 임다영.”
그는 하마터면 또 이 여자의 연기에 홀릴 뻔했다.
빌어먹을.
임다영은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화가 난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돈 때문이 아니라면 누가 당신 같은 사람과 함께 있고 싶겠어?”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순순히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민지영이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고 그녀는 서둘러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임다영은 미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이모. 무음으로 해놔서 이제야 봤어요.”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임예진의 목소리였다.
“나야.”
“왜 네가 전화를 받아?”
“이모의 핸드폰을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임다영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병문안 기록을 찾았어. 핸드폰은 빌린 거고.”
임다영은 긴장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대체 뭐 하려는 거야?”
“별일은 아니고. 그냥 물어보고 싶어서. 10억을 언제쯤 받을 수 있는지 말이야.”
“준다고 했잖아.”
“그럼 됐어. 참, 언제 시간 되면 밥 먹자. 연 대표님 비서까지 같이 말이야. 한 가족이니까 서로 알고 지내야지.”
임다영이 고급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임예진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중간에서 훼방 놓기로 결심했다.
“그 사람 많이 바빠, 시간 없어.”
임다영은 그들이 민지영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난 임예진은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세게 밟았다.
“나쁜 계집애. 잘난 척하기는. 언젠가는 내가 다 빼앗아 올 거야.”
임다영은 전화를 끊고 나서 초조해졌다.
반드시 돈을 받아야 했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모까지 연루될 것이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방을 나갔고 몰래 아래층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다.
임다영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고 몰래 거실을 내려다봤다.
연시윤은 엄청난 기세를 뿜으며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은 황제 같았고 옆에 있는 정민은 시중을 드는 내시 같아 보였다.
연시윤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는 연시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고 연시윤과 대적할 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 순간, 비서가 서류를 건네주자 젊은 남자가 고개를 돌리고 서류를 건네받았다.
임다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남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보육원 입구에서 여동생을 버리고 간 그 사람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 그날 연시윤이 나타난 것도 저 남자 때문인 것 같다.
별의별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젊은 남자가 뭔가를 느꼈는지 시선을 계단으로 옮겼다.
깜짝 놀라 서둘러 피하다가 실수로 모퉁이에 있는 꽃병에 부딪혔다.
쨍그랑.
꽃병이 땅에 떨어지고 파편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망했다. 사고를 치고 말았다.
“누구야?”
거실에 있는 사람들은 경계하기 시작했고 경호원은 심지어 호신 총기까지 꺼내 들었다.
연시윤의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가 정말... 얌전히 있으라고 했더니 기어코 사고를 치는군.’
“고양이가 장난친 것뿐이야. 다들 앉아.”
연시윤은 단호하게 말했고 육민우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피식 웃었다.
“연 대표님도 고양이를 키우는 걸 좋아하십니까?”
“귀찮게 하는 길고양이일 뿐입니다. 나중에 사람들 시켜서 깨끗이 처리할 거예요.”
연시윤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순간, 육민우는 측은지심이 생겼다.
“소은이가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그냥 놔두시죠.”
연시윤은 육민우가 문주에 온 이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여동생을 찾기 위해서였고 그 여동생의 이름은 소은이었다.
“육 대표님이 그렇게 말하니 살려주죠.”
모든 세부 사항에 대해 협의하고 나니 밤이 깊었다. 육민우를 배웅하고 연시윤은 위층으로 돌아갔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임다영을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정말 고양이처럼 잠이 들어있었다.
깊은 잠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떴다.
“왔어요?”
연시윤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나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꺼지라고.”
연시윤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더 했다.
“내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욕심이 많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 꽃병을 떨어뜨린 건 육민우의 주의를 끌려고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비열한 수단으로 그의 침대까지 기어오른 여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연시윤이 왜 또 이 난리를 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하지만 돈은...”
그 말에 그가 차갑게 웃었다.
하긴, 그녀가 한 모든 일은 돈 때문이 아니겠나?
그는 블랙 카드를 꺼내 무심하게 바닥에 던졌다.
“이 안에 20억 있어. 갖고 싶으면 기어가서 가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