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5화

할머니 얘기에 연시윤이 흠칫했다. 김정숙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몰아붙였다. “네 할머니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거 알지? 의사도 몇 년을 더 버티실 수 있을지 장담 못 한다더라. 그 전에 네가 유리랑 결혼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아니요, 저는 유리랑 결혼 안 합니다.” 연시윤이 단호하게 끊었다. “유리가 저를 구해준 건 고맙지만, 저는 그 애를 동생 이상으로 본 적 없습니다.” 김정숙의 눈이 매서워졌다. “유리가 아니면? 설마 이 천한 여우 같은 년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갑자기 임다영을 가리키며 쏘아붙였다. 연시윤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제 그만하시죠.” “그래, 그거면 됐다.” 김정숙은 짧게 숨을 고르며 표정을 풀었다. “그게 아니라면, 엄마 말대로 해. 저 여자는 잠시 곁에 두고 네 병 치료에 협조하게 해. 그리고 완치되는 대로 유리랑 결혼해서 네 할머니 소원부터 들어드리자.”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아들, 엄마가 한 말 잘 생각해 봐.” 연시윤이 금방 등을 돌릴 걸 알기에, 김정숙은 더 머물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괜히 여기서 체면을 구길 필요는 없었다. 임다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들 모자의 대화를 지켜봤다. ‘역시 재벌가는 피비린내 나는 일이 끊이질 않는군. 모자지간의 대화만 들어도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네.’ 연시윤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실컷 봤어?” “아니요. 아, 제 말은... 오늘 날씨가 꽤 좋네요.” 임다영은 황급히 화제를 틀었다. “표정 보니, 이 계약서에 사인하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네?” 그의 입가에는 냉소가 번졌다. 임다영은 그 비아냥을 애써 무시한 채,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연 대표님, 저... 혹시 제가 본의 아니게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건가요?” ‘영화에서도 아는 게 많으면 제일 먼저 죽던데... 방금 본 것만 해도, 연시윤은 친엄마든 부하든 가차 없이 잘라내는 사람인데... 다음 차례가 나면 어떡하지?’ 방금도 알 수 없는 충동을 애써 눌러놓느라 시간을 꽤 허비했다. 연시윤은 시선을 거두었다. 더는 임다영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됐다. “준비됐으면 들어오시죠!” 짧은 명령과 함께, 하얀 가운을 입은 의료진이 각종 장비를 들고 들이닥쳤다. 임다영은 눈이 커졌다. “아니, 저 하나 죽이는 데 이렇게 큰 규모가 필요해요?”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의료진 손에 쥐어진 굵은 주사기였다. 그걸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핑 돌았다. “저... 저 주삿바늘 공포증 있어요... 안 돼요. 저 빈혈도 있어서 피 보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냥, 차라리 총알 한 방에 죽여 주세요. 제발...” 그녀는 울먹이며 본능적으로 연시윤의 팔을 꽉 잡았다. 연시윤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 여자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면서, 은근히 나를 자극하고 있다...’ “그냥 건강검진이야. 근데 계속 붙어 있으면,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줄 수도 있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임다영은 온몸이 움찔했다. “네, 알았어요. 검사... 받을게요.” ‘고통스럽게 죽긴 싫어... 차라리 검진을 받고 말지.’ 임다영은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얌전해진 채 의료진의 안내에 따라 정밀 검사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검진 결과지가 연시윤의 손에 전달되었다. 그는 한눈에 훑어본 뒤, 가벼운 빈혈 외에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연시윤이 계약서를 임다영 앞으로 내던졌다. “사인해.” “근데...” 임다영이 거절하려 하자, 연시윤은 한 걸음 다가서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의 그림자가 그대로 그녀를 덮쳤고 숨이 막힐 듯한 기세가 몰려왔다. “순순히 사인하면 목숨은 살려주지. 석 달 뒤 약속한 돈은 줄 테니까, 그것만 받고 꺼져. 하지만 눈치 없이 버틴다면… 네 가족의 안위는 장담 못 한다.” 임다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말은... 저는 죽진 않을 수도 있지만, 제가 잘못하면 죽는 건 제 가족이라는 거죠?” “그래.” 연시윤의 입꼬리가 차갑게 휘어졌다. 그 한마디에 임다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사인할게요!” ‘이렇게 좋은 기회는 절대 놓치면 안 돼.’ 연시윤은 임다영을 속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놀랄 것도 없었다. 그때 문밖에서 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곧 회의가 시작됩니다.” 연시윤은 임다영 앞에 펜을 툭 던졌다. 그리고 임다영이 사인을 마치는 걸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자리를 떴다. “저 여자는 연씨 가문 외곽 별장에 보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거기서 기다리게 해.” “네.” ... 문주 외곽. 임다영은 그렇게 연씨 가문의 외곽 별장에 머물게 됐다. 본가에서 넘어온 집사는 이미 김정숙에게서 따로 지시를 받은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임다영 씨? 별장에 들어왔다고 안심하진 마세요. 도련님께서 시킨 일들이 산더미니까요.” “무슨 일인데요?” “도련님은 지금 회의 중이라 늦게야 돌아오실 겁니다. 여기 별장에는 하인이나 도우미는 없고 오직 다영 씨뿐이니까 해야 할 일이 많을 수밖에 없겠죠? 먼저 정원 손질부터 해요. 참고로, 정원에 심은 꽃과 나무는 임다영 씨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살 만큼 귀한 것들입니다. 전부 도련님이 해외에서 공수해 온 거니까 조심히 다뤄야 합니다.” 집사는 손가락을 꼽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요리는 할 줄 아세요? 주방에는 매일 항공으로 공수해 온 신선한 식자재가 들어올 겁니다. 도련님 입맛이 까다로워서 매일 다른 메뉴를 고심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지시 사항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임다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요한 것만 골라 메모장에 적었다. [꽃 한 송이만 잘못 건드려도 임씨 사문 전 재산을 탕진해도 다 못 갚을 것이고 요리를 망치면 연시윤의 심기를 건드려 역시 임씨 가문에 손해를 끼친다...] 그렇게 진지하게 메모하며 듣는 모습에, 집사도 의외라는 듯 다시 한번 그녀를 훑어봤다. “전부 기억했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임다영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지시하신 대로 연 대표님을 잘 모실게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본가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도련님 오실 때까지 얌전히 계세요. 도련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도망칠 길 따위 없을 테니까요.” 집사가 떠나자, 임다영은 정원에 펼쳐진 값비싼 꽃과 나무들을 바라보다 대형 가위를 움켜쥐었다. ... 해 질 무렵,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별장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기도 전에, 기다리다 못한 임다영이 달려 나갔다. “연 대표님! 오래 기다렸어요. 드디어 오셨네요!” 그 말투와 표정은 꾸며낸 기색 없이 들떠 있었고 또렷한 눈망울은 숲속에서 주인을 발견한 새끼 사슴처럼 초롱초롱했다. 연시윤은 미간을 좁혔다. 그런 눈빛은 낯설지 않았지만 임다영만큼 가감 없이, 당돌하게 들이대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정말 저렇게도 날 좋아하는 건가?’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를 스쳐 안으로 들어섰다. 임다영은 그의 옷에서 술 냄새를 맡았다. “연 대표님, 술 드셨어요?” 대답이 없자 그녀는 또다시 쫑알거렸다. “혹시 정원에 가서 꽃구경 안 하실래요? 대표님이 제일 아끼신다는 소리를 듣고 정말 힘들게 다 손질했어요...” 연시윤은 짜증이 치밀었다.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밤에 꽃구경하라 마라야?” “아...” 임다영은 멈칫했다. ‘맞네, 해가 저문 것도 깜빡했네.’ “그러면 제가 직접 요리해 드릴게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괜찮아. 먹고 왔어.” 그 말에 임다영은 눈을 크게 떴다. “꽃도 안 보고 밥도 안 드시면... 저는 뭐 해야 해요?” 그 멍한 표정이 묘하게 웃음을 자아냈지만, 연시윤은 들썩이는 입꼬리를 눌렀다. “계약서에 적혀 있잖아.” ‘계약서?’ 임다영은 계약서에 적힌 200억 원이라는 숫자만 빼고 나머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연시윤은 얼마 전 회의에서 대형 계약을 성사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축배로 한잔했다. 별장으로 돌아와 임다영을 마주하고 그녀의 살짝 벌어진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목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왜 그렇게 봐요?” 임다영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얼굴에 뭐 묻었어요?” ‘정원 손질하다 흙이 묻었나?’ 연시윤은 그녀의 턱을 잡아 들어 올리며 몸을 숙였다. “넌 지금 내 치료를 돕는 ‘약물’ 같은 거야. 앞으로 석 달 동안,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해야 해. 예를 들어... 그게 침대에서 몸을 쓰는 일이라도.” 그의 뜨거운 숨결이 임다영의 피부를 스쳤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입술이 맞닿기 직전 임다영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도 예전에 남자친구가 있긴 했다. 대학 새내기 시절, 끈질기게 따라붙던 선배와 잠깐 사귀었지만, 그가 자신이 임씨 가문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양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 임예진에게로 갈아탔다. 거기에 파렴치한 여자라는 뒷말까지 퍼뜨렸다. 결국 그녀는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도 스킨십은 손만 잡는 선에서 멈췄다. 며칠 전 연시윤의 침대에 오른 것도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이 또렷했다. 그가 바짝 다가오자,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찰싹!” 따끔한 소리와 함께 연시윤의 뺨에 손바닥 자국이 번졌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