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같은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진이한은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주방에서 물을 받던 민아진은 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가 손에 든 물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약 안 먹은 거야?”
민아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증상이 너무 심해서 위 세척하고 왔어.”
진이한이 허약한 몸을 소파에 맡겼다.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민아진은 손이 덜덜 떨려 들고 있던 뜨거운 물이 손등으로 튀면서 빨갛게 부어올랐다.
‘송혜연이 그렇게 좋은가? 위 세척하면서까지 요리를 먹어줄 만큼?’
따듯한 물을 한 잔 따라 그쪽으로 걸어간 민아진은 자리에 앉아 진이한의 위를 살살 주물러줬다. 물을 마신 진이한은 민아진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속이 편해졌는지 미간이 살짝 풀렸고 민아진의 어깨에 기댄 채 그대로 잠들었다. 예전에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민아진은 이번에 진이한의 잘생긴 얼굴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소파에 잘 눕혀둔 채 담요를 덮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
이튿날, 잠에서 깨보니 진이한은 이미 슈트까지 입은 채 거실에 서 있었다.
“물건이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이 빠진 거야?”
진이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민아진이 대꾸하려는데 진이한이 화제를 돌렸다.
“오늘 혜연이 우리를 그림 전시회에 초대했어.”
“나는...”
“혜연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친구가 없어.”
진이한은 민아진이 거절하지 못하게 막았다.
“기를 좀 북돋아 준다고 생각해.”
민아진은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끝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회 현장, 송혜연은 진이한을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친근하게 팔짱을 꼈다.
“이한아. 내가 제일 보여주고 싶었던 그림은 이거야.”
송혜연은 설산이 그려진 그림 한 폭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스웰턴에서 그린 건데 그때는 매일 네 생각만 했어...”
진이한은 말없이 송혜연의 설명을 들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림을 감상하다 결국 모든 그림을 다 사들였다.
순간 전시회를 보러 온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진 대표님이 송혜연 씨를 무척 아낀다더니 사실인가 봐...”
“한번 버림받았는데도 이렇게 공들이는 걸 보면 찐사랑인 것 같은데...”
송혜연이 우쭐거리며 민아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진이한이 계산하러 간 사이 민아진에게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들었어?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도 이한의 마음속에는 나밖에 없어.”
송혜연이 목소리를 낮추고 빨간 입술을 민아진의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아직도 미련 못 버렸다면 내가 더 자세히 보여줄게.”
말이 끝나기 바쁘게 귀청이 째질듯한 화재 경보음이 울렸다.
“불이야. 어서 도망가.”
사람들 틈에 껴있던 민아진은 도망가는 인파에 밀려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너무 아파 눈앞이 다 깜깜했다.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진이한이 빠른 속도로 역행하는 게 보였다.
“혜연아, 혜연아, 어딨어?”
민아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당황한 목소리였다. 이내 겁에 질린 송혜연을 찾아낸 진이한은 번쩍 안아 든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갔다.
바닥에 주저앉은 민아진은 두 사람이 뿌연 연기를 뚫고 사라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불타던 대들보가 그대로 민아진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
다시 깨어났을 때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아진아. 깼어?”
친구 임유정이 침대맡으로 달려와 눈시울을 붉히며 걱정했다.
“놀랐잖아. 나는 네가 영영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
민아진이 힘겹게 목을 움직였지만 온몸의 뼈가 부서졌다가 다시 이어진 것처럼 너무 아팠다.
“진이한은?”
민아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임유정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진이한? 지금쯤 송혜연 곁을 지키고 있을걸? 너는 고작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송혜연은 무려 찰과상이거든. 당연히 잘 보살펴야지.”
민아진은 숨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진이한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야? 하반신 마비가 와서 움직일 수 없을 때 누가 보살펴줬는데? 혹시나 어리석은 생각 하면 어쩌나 걱정해서 매일 한두 시간밖에 못 잤잖아. 너 지금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진이한은...”
임유정이 민아진의 손을 꼭 잡아주며 울먹였다.
“아진아, 진이한 이제 다 나았는데도 사귀자는 말 없잖아. 언제까지 이렇게 억울하게 살 거야?”
조용한 병실은 의료기기에서 나는 규칙적인 신호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야 민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비자 만드는 중이야. 비자 나오면...”
민아진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바로 갈 거야.”
말이 끝나기 바쁘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간다고?”
입구에 선 진이한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간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