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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홍서윤이 사진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자 벌써 열 시였다. 이 시간쯤이면 최태준이 돌아올 때였던지라 홍서윤은 아래로 내려가 잔치국수를 만들었다. 마침 최태준이 돌아왔고 홍서윤은 그가 보내는 차갑고 혐오스러운 시선을 견뎌내며 조심스럽게 잔치국수를 내밀었다. “아저씨, 이건 제가 만든 국수예요. 드실래요?” 최태준은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무뚝뚝하게 시선을 거두더니 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유아람에게 말했다.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어? 먼저 먹고 있어.” 유아람은 홍서윤의 손에서 국수를 받아 몇 입 먹더니 곧바로 휴지로 입을 막고 뱉어내며 버리려는 시늉 했다. 그러고는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으엑, 맛없어.” 최태준은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내가 해줄게.” 그 순간 홍서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에는 충격과 믿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고통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직접 국수를 만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비록 맛은 형편없었지만 최태준은 그럼에도 전부 다 먹어주었다. 그 뒤로 최태준은 그녀가 다시는 이런 걸 하지 못하게 했고 오히려 스스로 요리를 배워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주며 오직 그녀에게만 해주겠다고 약속도 했었다. 그때의 홍서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의 최태준은 예전에 했던 말을 전부 잊은 듯 다른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심지어 다른 이가 그녀가 만든 것을 짓밟는 걸 두고만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최태준은 정말로 유아람을 사랑하는 듯했다. 홍서윤은 생각했다. 자신은 최태준에게 있어 그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아주 가소로운 존재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녀의 마음마저 신경 써주겠는가. 가슴 깊숙이 밀려오는 씁쓸함을 꾹 삼키며 그릇을 받아 눈물과 함께 홀로 그 한 그릇의 국수를 꾸역꾸역 먹었다. 최태준은 그런 홍서윤을 차갑게 보았다. 그 눈빛은 칼날과도 같아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살이 아프게 떨어지는 듯했다. “집에 가정부도 있는데 앞으로는 직접 하지 마.” 그는 이 말만 남기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최태준의 침실은 바로 홍서윤의 방 옆에 있었고 불빛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이미 해탈해진 홍서윤은 소파에 앉아 최태준의 방에서 들려오는 낯부끄러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나오는데도 홍서윤은 아무런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두 사람의 방은 방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홍서윤이 처음 최씨 가문에 왔을 때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비 오는 날을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태준은 일부러 방음이 완벽하지 않게 리모델링하여 홍서윤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 곧바로 달려올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 완벽하지 못한 방음과 그의 세심함은 오히려 홍서윤의 가슴을 찌르는 흉기가 되어버렸다. 홍서윤은 결국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날을 샜다. 이 두 달 동안 홍서윤은 감히 쉬지도 못했다. 유학 비용을 모아야 했기에 학교 선생님이 소개해준 몇 건의 건축디자인 일과 식당에서의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서야 거의 모을 수 있었다. 밤에 식당에서 일하던 중 누군가 식당 전체를 빌리는 일이 있었는데 마침 홍서윤이 근무하는 날이었다. 홍서윤은 카트를 밀고 나갔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을 보고 잠시 멈칫했으나 곧 진정하며 차분하게 음식을 내놓았다. 유아람은 웃으며 홍서윤의 이름을 불렀다. “서윤아, 너 여기서 일해? 아직 밥도 못 먹었지? 우리랑 같이 먹자.” 홍서윤은 와인을 따라주며 유아람의 말을 무시한 채 무표정하게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참, 서윤아. 네가 바이올린 켤 줄 안다는 거 어디서 들은 것 같아. 네가 켜는 바이올린은 아직 못 들어본 것 같아서...” 이내 유아람은 턱을 괴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참에 들려주면 안 돼?” 홍서윤은 며칠째 설계도를 그리고 모형까지 손수 만드느라 손에 반창고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최태준 또한 반창고를 본 것인지 미간을 구기며 저도 모르게 안쓰러운 듯한 눈빛을 했다.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왜 자기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일하는 건데!' ‘아니면 내가 준 용돈이 부족한가?' 이렇게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홍서윤의 손을 치료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내 막 홍서윤을 끌어당기려던 순간 옆에 있던 유아람이 입을 열었다. “서윤아, 네가 여기서 일하면서 많은 친구를 알게 되었다고 들었어. 최씨 가문에서 지내고 있으니까 돈은 부족하지 않겠지. 그럼 정말로 친구 사귀려고 여기서 일하는 거야?” 유아람은 더 환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사실 나한테는 말해도 돼. 내가 너랑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을 소개해줄 수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고생할 필요 없어.” 말을 마치자 최태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잊고 있었다. 홍서윤이 자신의 곁에 있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쓰던 사람이라는 걸. 이제 자신이 관심을 끈 것 같으니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최태준의 두 눈에 분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이를 빠득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십여 년 동안 곁에 두고 길러온 홍서윤이 어쩌다 이런 속물적인 여자로 변한 것인지. 홍서윤이 입을 열려고 하자 최태준은 곧장 지갑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 홍서윤 앞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시작해 봐.” 홍서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가슴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듯했으나 손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던지라 유아람이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최태준의 곁에 있었던 탓에 최태준이 유아람의 말만 믿고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눈가가 붉게 물들었으나 홍서윤은 눈을 깜빡이며 간신히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아저씨, 어떤 곡을 듣고 싶으세요?” 홍서윤은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린 채 무표정하게 두 사람을 보았다. 유아람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잘하는 곡으로 하면 돼.” 홍서윤은 더는 말하지 않고 묵묵히 연주를 시작했다. 그윽한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손의 상처가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본 유아람은 놀라 소리를 쳤다. “어머, 서윤아, 그만해! 피가 나잖아.” 유아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홍서윤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을 빼앗으려 하자 옆에 있던 최태준이 낮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그 말들 들은 홍서윤은 연주를 이어갔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어도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최태준이 꺼낸 지폐를 챙겼다. “고마워요, 아저씨.” 홍서윤은 담담하게 그를 불렀다. 열일곱 살 소년의 모습은 홍서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눈앞에 남은 건 그저 ‘아저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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