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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성주원이 잠에서 깨어났다. 눈빛은 아직 흐릿했지만 이내 눈가를 비비듯 눌러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예리하고 맑은 기운이 돌아왔다. 공기 속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홍서윤에게서만 나는 향기였다. 잠시 멍을 때리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아직 남아 있는 게 보였다. 막 잠에서 깼는지라 성주원은 쉰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 “양 실장이 안 데려다줬어요?” 홍서윤은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조금 두려웠다. “제가 남겠다고 했어요.” 시선을 내려 자기 위에 덮여 있는 재킷을 보더니 성주원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서윤 씨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안 무서워요?” “안 그러실 거잖아요.” 홍서윤이 살짝 웃었다. 그가 뭘 하려 했다면 기회는 이미 많았다. 단호하게 내뱉는 말과 촉촉한 눈빛 속에는 성주원을 향한 전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성주원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외투를 집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따라와요.” 그렇게 홍서윤은 묵묵히 성주원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사방을 둘러봤다. 인테리어는 주인과 똑 닮아 있었다. 검은색, 흰색, 회색. 세 가지 색만으로 이뤄져 있었지만 전혀 밋밋하지 않고 은근한 고급스러움이 풍겼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조명, 거대한 통창으로 들어오는 바깥 풍경, 3층까지 이어진 나선형 계단까지 집 안 곳곳에서 호화로움이 묻어났다. 성주원은 와인장이 아닌 위스키 진열장을 열고 한 병을 꺼냈다. “오늘 밤 어디서 잘 건지는 서윤 씨가 골라요.” “저는... 소파에서 잘게요.” 홍서윤은 그의 뜻을 오해했다. 따로 의도를 갖고 온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남녀 단둘이 있는 상황이라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셔츠 소매를 걷던 성주원은 손길을 멈추더니 차 키를 들며 말했다. “그럼 데려다줄게요.” 홍서윤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성주원은 고개를 내려 그 하얀 손을 오래 응시했다. 그러자 홍서윤은 이내 눈치채고 황급히 손을 뗐다. 그러고는 아무렇게나 손가락으로 방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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