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원래부터 깊이 잠들지 못했던 하예원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깨고 말았다. 이내 귀가 아플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예원! 잘난 척하더니 왜 갑자기 안 어울리게 아픈 척이야?”
하예원은 눈을 떴다. 윤수아는 잔뜩 심술이 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하예원을 보며 욕을 퍼붓고 있었다.
“하예원, 네가 뭔데? 감히 내 사과를 받으려고 해? 지난번 밀었을 때도 난 사과한 적 없어. 그런데 이번이라고 다를 것 같아?! 도경 오빠가 있는데 네가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하예원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지금이 새벽 6시 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젯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다시 잠들려고 했을 때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병실에는 하예원과 윤수아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예원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차갑게 말했다.
“네가 여긴 왜 왔어?”
하예원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힘도 없었던지라 병실이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면 하예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윤수아는 하예원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 아직도 연기하는 거야?! 하예원, 네가 도경 오빠한테 고자질했다는 거 다 알고 있어! 그런다고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
몇 시간 전 윤희설이 윤수아를 불러 하예원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윤수아는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하예원의 병실로 찾아와 서랍에 있던 컵을 들어 하예원의 얼굴을 향해 물을 뿌리며 화풀이했다.
하예원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반응도 느려 피하지 못했다. 결국 그대로 맞아버리고 말았다.
“내 사과 그렇게 듣고 싶어? 그래, 어차피 사과해야 하는 거라면...”
윤수아의 눈빛이 흉악하게 변했다.
“마음껏 즐기기라도 해야지 않겠어?!”
말을 마친 후 윤수아는 손을 올려 하예원의 뺨을 세게 때리려고 했다. 하예원은 그런 윤수아의 팔을 잡았기에 다행히 맞지 않았다. 아직 열이 내리지 않았는지 하예원의 손바닥은 아주 뜨거웠다.
윤수아는 몇 초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다른 한 손을 들어 뜨거운 하예원의 손을 떼어내고 손목을 꽉 잡았다. 벗어나지 못하게. 그런데 분명 환자인데 윤수아는 하예원의 손을 쉽게 떼어내지 못했다. 그때 하예원이 갑자기 손을 놓았다. 갑자기 손을 놓을 줄 몰랐던 윤수아는 힘을 너무 세게 준 탓에 결국 넘어지고 말았고 컵도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쨍그랑!
컵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동시에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 남자가 병실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하예원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다급하게 들어온 것이었지만 남자의 눈앞에는 바닥에 넘어진 윤수아가 보여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내 윤희설도 매니저와 함께 들어왔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윤희설도 당황하고 말았다. 침대에 있는 윤희설을 보다가 바닥에 넘어진 윤수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목소리를 들은 윤수아는 고개를 들었다. 최도경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윤수아는 눈물을 머금은 채 억울한 듯 말했다.
“희설아, 도경 오빠. 난 그냥 걱정되기도 하고 사과하려고 하예원 보러 온 건데... 사과받아주기 싫다면서 날 밀쳤어.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 하예원은 아픈 척 연기하고 있는 거라고. 다들 내 말 믿어주지 않고...”
윤수아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날 이렇게 밀칠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안 그래?”
윤희설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윤희설을 보았다.
“하예원 씨, 죄송해요. 어젯밤은 제가 다리를 다쳐서 미처 보러 오지 못했어요... 나중에 익사할 뻔했다고 들었을 땐 이미 늦은 시각이라 쉬는 데 방해될까 봐 오지 못한 거였어요. 어젯밤에 어쩌다가 물에 빠진 건지 말해줄 수 있을까요?”
하예원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쪽 사촌 동생인 윤수아가 밀었...”
하예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윤수아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고 결국 묻혔다.
“내가 밀었다고. 증거 있어? 넌 일부러 수영장으로 뛰어든 거잖아...”
이내 고개를 돌려 윤희설을 보며 고자질하듯 말했다.
“그때도 하예원이 도경 오빠를 찾아와 질척거렸어. 도경 오빠가 가버리고 나서 갑자기 물에 뛰어들더라고. 어떻게든 도경 오빠 붙잡아보려고 일부러 뛰어든 거야. 그런데 도경 오빠가 관심조차 없을 줄은 몰랐겠지!”
최도경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하예원을 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예원, 사실이야?”
하예원이 말을 하려던 때 윤수아가 또 먼저 나서서 말 못 하게 했다.
“그리고... 다들 하예원이 수영 잘한다는 거 알고 있잖아. 전에 수상 경력도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나오지 못할 수가 있겠어?”
윤희설은 미간을 구긴 채 하예원을 보았다.
“하예원 씨,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윤수아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내가 말한 게 전부 사실이니까 찔려서 말 못 하는 거잖아. 이미 다 들킨 마당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윤수아의 목소리에는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고 심지어 웃기도 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전부 하예원을 향해 있자 하예원은 혈색 없는 입술을 올리며 픽 웃어버렸다.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다 꺼져!”
윤수아는 하예원이 어제의 일에 관해 설명하지 않자 더 기세등등해졌다. 얼른 바닥에서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하예원, 너 말 아주 잘하잖아. 그런데 지금은 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야?”
하예원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후 최도경을 보았다.
“최도경, 넌 내가 죽지 않아서 아주 실망했지? 그래서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은 틈을 타 이런 악마들을 불러온 거야? 물에 빠져도 죽지 않으니 화병이라도 걸려서 죽게 하려고? 아니면 내가 저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라도 바라는 거야?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줬으면 좋겠지?”
최도경은 시선을 떨구고 하예원을 보았다. 그제야 하예원의 얼굴에 물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담담하게 물었다.
“얼굴에 물기는 왜 있는 거지?”
그러자 윤수아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
“도경 오빠, 방금 하예원이 글쎄 갑자기 컵을 들더니 자기 얼굴에 물을 뿌리더라고요. 그리고 바닥으로 던졌어요...”
윤수아는 바닥에 깨진 유리컵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봐요. 저게 하예원이 던진 컵이에요... 분명 오빠랑 희설이 발걸음 소리 듣고 날 모함하려고 준비한 거예요!”
최도경은 시선을 돌려 하예원을 보았다.
“윤수아 말이 맞아?”
하예원은 차갑게 픽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예원.”
결국 하예원은 입을 열었다.
“꺼져.”
이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고 있는 세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대놓고 혐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속에는 경멸과 무시가 담겨 있었다. 마치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싸구려 광대를 구경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윤수아는 아무런 반박도 못 하는 하예원을 보며 대놓고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하예원, 내가 널 수영장으로 밀었다고 했지? 내 사과를 원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야? 어디 변명이라도 좀 해... 아악!”
하예원은 갑자기 서랍 위에 있던 컵을 집어 들어 윤수아를 향해 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