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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일과 관련된 메시지와 메일 외에 채시아로부터 걸려온 전화나 사과의 문자는 하나도 없었다. “한번 해보겠다 이거지?” 윤성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침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흠칫하며 놀라고야 말았다. 식자재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각종 한약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들어 보니 [불임 치료 약. 하루에 다섯 포]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불임?” 윤성빈은 코를 찌르는 한약 냄새에 그제야 채시아의 몸에서 간간이 나던 냄새가 뭐였는지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그녀를 한껏 비웃었다. 애초에 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데 이런 약을 아무리 먹어봤자 애가 생길 리가 없었으니까. 윤성빈은 한약을 도로 냉장고 안에 던져 놓고는 다시 침실로 향했다. “저게 문제였네.” 그는 채시아가 집을 나간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는 듯 한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침대에 털썩 누워 눈을 감으니 잠이 절로 쏟아졌다. 채시아가 있을 때는 그녀를 피하느라 잠도 불편하게 자야만 했는데 그녀가 없으니 살 것만 같았다. 윤성빈은 꿀잠을 잔 후 슬슬 몸을 일으키며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신도영과 골프 약속을 한 날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 그는 거실을 지나며 습관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오늘 안 들어...” 하지만 금세 채시아가 없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골프장. 윤성빈은 원래도 잘생겼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잘생겨 보였다. 흰색 골프복을 입은 채로 자세를 잡으니 화보가 따로 없었다. 신도영은 가볍게 홀인원에 성공한 윤성빈을 보며 감탄의 박수를 쳤다. “오늘 컨디션 좋은데?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채시아와 윤성빈이 이혼한다는 소식은 입 싼 친척들 때문에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 알 사람 중에는 당연히 신도영도 포함해 있었지만 신도영은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이유는 윤성빈의 입으로 직접 이혼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밖에서 대기 중인 임수아를 부르기 편할 테니까. 윤성빈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채시아와 이혼하려고.” 신도영은 자신이 말을 유도해놓고 정작 윤성빈이 원하는 답을 해주자 잠시 벙찐 얼굴을 했다. 윤성빈의 껌딱지인 채시아가 순순히 윤성빈을 놓아줬다는 게 영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물었다. “그 귀머거리가 순순히 해주겠대?” 윤성빈은 그 말에 표정을 살짝 굳혔다. “걔가 먼저 꺼낸 얘기야.” 신도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히도 네 관심이 필요했나 보네. 여자들은 꼭 그런 속이 다 보이는 수법을 쓰더라?” 그는 말을 마친 후 윤성빈을 바라보며 대뜸 미소를 지었다. “참, 내가 오늘 너 주려고 서프라이즈 하나 준비했는데.” 그 말에 윤성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신도영은 잠시만 기다리라며 임수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몇 분 후, 예쁜 운동복을 입은 임수아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신도영은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눈치껏 자리를 빠져주었다. “그럼 둘이서 얘기 나눠.” 임수아는 신도영에게 눈빛으로 인사하고는 금방 다시 윤성빈을 바라보며 근처로 나가서 걷자고 했다. 골프장에서 나와 조금 걷다 보니 두 사람이 다녔던 대학교 캠퍼스가 나왔다. 임수아는 그와 산책로를 걸으며 예전 얘기를 꺼냈다. “오빠, 이 길 기억나요? 우리 사귈 때 자주 걸었던 길이잖아요. 그때 오빠가 내 손을 잡으면서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같이 걷고 싶다고 했던 말, 나 아직도 기억해요.” 임수아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윤성빈 쪽으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때처럼 내 손 다시 잡아주면 안 돼요?” 윤성빈은 임수아의 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해버렸다. 그러고는 담담한 얼굴로 얘기했다. “이미 지난 일이야. 제대로 기억도 안 나.” 공부하고 연애하고 또 결혼하고 일을 하는 건 윤성빈에게 있어 말하자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인생의 과제일 뿐 큰 의미는 없었다. 그게 아무리 첫사랑이라고 해도 말이다. 임수아는 그의 단호한 태도에 눈물을 글썽였다. “혹시 나 아직도 원망해요? 내가 그때 오빠 곁을 떠나서? 하지만 나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요. 나라고 좋아서 오빠 곁을 떠났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는 게 나라고 쉬웠겠냐고요... 내가 그간 무슨 생각으로 해외 생활을 버텼는지 오빠는 모르죠? 나는 다시 오빠랑 만나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어요. 오빠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그 생각 하나로 버텼다고요.” 윤성빈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 이미 결혼했어.” “알아요. 채시아 씨가 오빠랑 이혼하겠다고 한 것도 알고요.” 임수아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더는 못 참겠는지 그대로 윤성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채시아 씨가 미워요. 정말 너무 많이 미워요. 채시아 씨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헤어질 일도 없었잖아요.” 사람이라는 건 원래 이렇게 자기 좋을 대로 기억하는 생물인 건가? 임수아는 윤성빈이 채시아와 약혼한 게 자신과 헤어진 뒤라는 건 새까맣게 잊은 듯했다. 채시아, 채시아... 윤성빈은 채시아의 이름을 들어서 그런지 머릿속으로 그녀와의 일화가 멋대로 떠올랐다. 채건우가 고인이 되어버린 직후 채시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 좀 안아주면 안 돼요...?” 하지만 당시는 그녀의 동생인 채선우가 두 가문 사이의 약속을 깨고 모든 돈을 집어삼킨 뒤라 윤성빈은 채시아의 앞을 매정하게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아무런 위로의 말도 건네주지 않았다. 윤성빈은 왜 그때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됐든 임수아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이 상황은 확실히 불편하게 느껴져 그녀를 단호하게 밀어냈다. 임수아는 뒤로 밀려난 후 뭐라 더 얘기하려는 듯 다시금 앞으로 다가갔다가 신도영이 다급하게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눈물부터 닦아냈다. 신도영은 둘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긴 했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더 급했기에 얼른 윤성빈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이거 좀 봐봐.” 윤성빈의 손에 쥐어진 건 다름 아닌 재산 양도 협의서였다. “이거 채시아 쪽 변호사가 보낸 거야. 채시아가 지난 3년간의 결혼 생활에 대한 보상이라면서 너한테 주는 거.” 사실 신도영은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설마 채시아 측에서 보상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한편, 윤성빈은 재산 양도 협의서라는 글자를 봤을 때는 조금 놀란 듯했다가 그 금액이 2백억인 걸 보고는 금세 코웃음을 쳤다. “달랑 2백억으로 자기랑 자기 가족들을 용서해 달라?” 윤성빈은 신도영과 임수아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대놓고 소리를 내며 비아냥거렸다. 신도영은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고는 똑같이 코웃음을 쳤다. “근데 아무것도 없는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2백억이나 숨기고 있었네? 걔네 동생이랑 걔네 엄마는 이 사실을 알려나?” 임수아는 채시아를 대하는 윤성빈의 태도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호기롭게 윤성빈을 되찾으러 왔다고 하기는 했지만 윤성빈이 혹시라도 채시아에게 정이 들어버렸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아주 조금은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애초에 윤성빈 같은 남자가 채시아 같은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 ... 한편, 어두운 모텔 방안. 채시아는 비몽사몽 눈을 떴다가 갑작스러운 두통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주위가 유독 더 조용한 걸 보니 아무래도 증상이 더 심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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