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게임기를 굳이 사주려는 건 분명 내가 거기에 빠져서 엇나가길 바라는 거야. 그래야 아빠가 나를 싫어하게 될 테니까.’ 배지욱은 입술을 달싹이며 진실을 말하려 했지만 곧 마주친 아버지 눈빛 속에는 은근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결국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네. 저는 좋았어요.” “정말?” 배현민은 안도한 듯 아들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제 지욱이도 엄마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이제부터 우리 네 식구, 사이좋게 지내자.” 배지욱은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배현민 앞에서 잘하는 척할 수 있지만 앞으로도 홍시연이 계속 자신에게 잘해줄지는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함만 더 커졌다. ... 같은 시각, 집에 돌아온 곽이서는 책가방을 벗어 던지자마자 내게로 달려왔다. 아이는 팔을 크게 벌리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배지욱이 친구들 앞에서 저한테 사과했어요!” 나는 일부러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그러자 곽이서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진짜 기분 좋았어요.” 말을 마친 아이는 스르르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두 팔로 내 팔을 꼭 끌어안으며 아이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있잖아요. 예전에 제가 아빠랑 말도 안 하던 때에도 이런 일 많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한 번도 얘기 안 했죠.” “아빠가 저를 데리러 올 때도 속으로는 엄청 속상했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요. 그래서 아빠도 몰랐던 거예요.” 그 소리는 맑으면서도 어린아이만의 서툰 단단함이 섞여 있었다. “거의 대부분은 그냥 제가 참고 넘어갔어요.” 나는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우리 이서, 혼자 속으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많이 힘들었지?” 그 순간까지도 방긋거리던 곽이서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금세 두 눈에 눈물이 맺혀 그렁그렁해졌다. “네.” 애써 눈물을 참던 아이는 힘겹게 대답했고 나는 곽이서의 통통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살짝 입을 맞췄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