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결혼 7년 만의 임신
결혼 7년 만에 드디어 주서훈의 아이를 가졌다.
나는 기쁨의 눈물을 훔치고 두 줄이 선명한 임신 테스트기를 주머니에 넣은 다음 가슴 가득 행복을 안고 소파에 앉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나와 주서훈의 결혼 7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이 작은 생명은 그야말로 서프라이즈처럼 우리들을 찾아왔다.
밤 10시가 가까워질 무렵 현관문이 철컥 열렸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왔어? 서훈아?”
습관처럼 주서훈의 슬리퍼를 챙겨주려다가 문득 뱃속의 아기가 떠올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의 움직임에 주서훈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기다리지 말라고 했잖아.”
주서훈이 슬리퍼를 갈아 신는 사이 나는 주방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닭곰탕을 들고 나왔다.
“오늘은 특별한 날...”
말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던 임신 테스트기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어렵게 찾아온 생명의 기쁨을 그와 함께 나누려던 그때 주서훈의 휴대폰이 윙윙 진동했다. 화면이 밝아지는 찰나 나는 베란다의 유리창에 비친 이름을 똑똑히 보았다.
윤소민이었다.
‘또 윤소민이야?’
나는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어버렸다.
“서훈아...”
주서훈을 붙잡으려던 그때 그는 휴대폰을 꽉 쥔 채 뒤돌아보지도 않고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결혼 7년, 우리 사이에는 늘 어떤 벽이 있는 듯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주서훈을 봤다.
‘서훈이도 말할 때 저렇게 다정할 수 있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구나.’
이 다정함은 내게는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사치품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 섰다. 유리에 손을 대려던 순간 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주서훈의 입가에 차가움이 스치더니 갑자기 나를 휙 돌아봤다.
임신 테스트기를 너무 꽉 쥔 바람에 손가락 마디가 새하얘졌고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결국에는 소민이 전화를 받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주서훈의 얼굴에 나타났던 다정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휴대폰을 쥔 채 유리문을 열고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소민이 전화를 끊은 적이 있었어?”
그의 목소리가 뼛속까지 시릴 듯 차가웠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은솔, 너 언제부터 이렇게 비겁해졌어?”
그러고는 내 앞에서 겉옷을 챙겨 입었다.
‘내가 비겁하다고? 그럼 우리가 결혼한 지 7년인 걸 뻔히 알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하는 윤소민은 고상하고?’
“오늘 나한테 몇 번이나 전화해서 빨리 집으로 오라고 재촉한 이유가 소민이가 나한테 연락 못 하게 하려고 그랬던 거야? 소민이 지금 많이 아파. 알아?”
주서훈은 나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친 후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문을 가로막고 그를 막아섰다.
“못 나가!”
“비켜.”
주서훈의 말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내가 쥐고 있는 임신 테스트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를 힘껏 밀쳤다.
“소민이 혼자 병원에 둘 수 없어.”
서둘러 신발을 갈아 신는 그의 모습을 보던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픈데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소민이 전화를 끊었으면 뭐? 오늘 우리 결혼 7주년 기념일이야. 네가 나가지 못하게 막고 소민이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그렇게 잘못이야? 그리고 걔 그냥 감기잖아.”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던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돌아온 건 주서훈의 싸늘한 웃음뿐이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아직도 몰라?”
주서훈의 두 눈에 불만이 가득했다.
“지금 소민이 만나러 가면... 이혼이야, 우린.”
그 두 글자를 내뱉은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혼은 내게 남은 마지막 카드이자 7년 동안 유일하게 친 발버둥이었다.
“그러든지.”
이 말을 끝으로 주서훈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힌 굉음이 텅 빈 거실에 울려 퍼졌다가 다시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나는 멍하니 벽에 몸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무릎을 껴안은 순간 몸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나는 주서훈에게 첫눈에 반했다.
어릴 적에는 항상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그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껌딱지였다.
그러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 위기가 닥친 후 형편이 괜찮은 집안에서는 자식들을 죄다 유학을 보냈다.
윤소민도 그중 하나였다. 주서훈이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상심했었는지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와 결혼하게 된 것도 사실 그 위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주씨 가문이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주서훈에게 결혼으로 그 은혜를 갚으라고 강요했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이 성사됐다.
7년 동안 나는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쳤다. 아무리 단단한 돌이라도 이 정도면 녹아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주서훈의 마음은 나에게 향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물이 고여 앞이 흐려질 때쯤 휴대폰이 다시 켜졌다. 화면에 뜬 문자를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미처 무음 모드로 설정하지 못한 동창 단톡방에 몇몇 친구들이 문자를 주고받았다. 맨 위에 사진 한 장이 떴는데 어두운 가로등 아래 주서훈과 가녀린 여자가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입술이 여자의 이마에 닿아 있었다.
그 여자가 바로 윤소민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이 새끼 토끼처럼 가여워 보였다.
[대박. 퀸카랑 킹카가 화해했어?]
[세상에나. 분위기 너무 로맨틱한 거 아니야? 송은솔은? 은솔아, 빨리 나와서 봐. 네가 방해만 안 했어도 두 사람 애가 벌써 다 컸겠어.]
[너무 잘 어울려. 응원해, 두 사람...]
[송은솔은 왜 저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이게 진짜 커플이지.]
사진 한 장에 단톡방이 아주 시끌벅적해졌다. 나를 향한 악의적인 말들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심장을 찔렀다.
‘아프다고 병원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길거리에서 키스하면서 애정을 과시해?’
알고 보니 주서훈에게 마음과 다정한 면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가 마음에 품은 사람이 내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방해꾼, 소름 끼치게 집착하는 속물녀라 생각했다.
차가운 말들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던 그때 어디서 힘이 솟아났는지 몸을 벌떡 일으켜 텅 빈 집을 나섰다.
이곳은 나와 주서훈이 7년을 함께 산 집이었다.
지난 7년간 그가 집으로 들어온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집이라기보다는 화려한 감옥 같았다. 나와 주서훈의 결혼처럼 겉모습만 번지르르했다.
나는 밖으로 나와 운전석에 탔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7년 동안 주서훈을 챙기느라 친구, 그리고 가족과 멀어졌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갈 곳도 없었다.
나는 목적지 없이 차를 몰았다. 심장이 여전히 칼로 도려낸 것처럼 아팠다.
언제부턴가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진 채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렸다.
그러다가 폭우가 쏟아졌다. 와이퍼로 아무리 닦아도 눈앞이 흐리기만 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창밖의 빗소리가 내 귀에 때려 박혀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칠흑같이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차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은 순간 차가 균형을 잃고 그대로 산 벽을 들이받았다.
아랫배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면서 따뜻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려 하얀 치맛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내 아기...’
이젠 마음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아파졌다.
어둠이 나를 집어삼킬 무렵 주서훈의 차가운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개교 100주년, 모든 것이...”
내가 깨어났을 때 귓가에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했다. 주변은 새하얀 병실도, 음산한 무덤도 아니었다.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지난 7년간 나를 짓누르던 우울한 그림자를 한순간에 몰아내고 자유의 공기를 되찾은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해맑게 웃고 있는 학생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교복을 입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송은솔, 무슨 일 있어?”
바로 그때 서늘하면서도 소년 특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안 죽었어?’
나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건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의 교복을 입은 소년이었다. 그의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혐오와 귀찮음이 가득했다.
그 소년은 다름 아닌 열여덟 살의 주서훈이었다.
‘이때부터 날 싫어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