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다음 날, 서예은이 막 회사에 도착했을 때 주현진이 그녀를 찾아왔다.
서예은은 그가 드디어 사인한 줄 알았지만, 주현진은 여전히 협상이 필요하다며 조건을 내밀었다.
바로 오늘 밤 그와 함께 비즈니스 만찬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서예은은 주현진과 함께 자주 동행했었고, 회사 클라이언트 대부분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서예은은 참을성 있고 꼼꼼한 성격 덕분에 고객들 사이에서 늘 평판이 높았다.
최근 몇 건의 중요한 거래가 진행 중인 만큼, 주현진은 불필요한 소란을 피하고 싶었다.
만약 자신이 서지안과 함께 나타난다면 고객들이 이상하게 여길 게 뻔했고 협력 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서예은은 그저 평범한 만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수락했다.
그녀는 미리 박시우에게 오늘 밤 비즈니스 만찬에 참석해야 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확인한 박시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비즈니스 만찬? 방금 인 비서가 보고한 그 행사인가?’
박시우는 원래 참석할 생각이 없었지만, 아내가 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는 즉시 인훈에게 자신도 참석하겠다고 통보했다.
인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박시우를 바라봤다.
‘뭐지? 박 대표님은 평소에 결정을 번복하시는 분이 아닌데? 게다가 방금 누구의 문자를 보고 미소까지 지으신 거야? 요즘 세상이 정말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네.”
퇴근 후, 서예은이 회사 문을 나서자, 주현진의 차가 길가에 대기 중이었다.
그녀가 차에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열렸고 뒷좌석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서지안의 얼굴이 비쳤다.
“언니, 괜찮지? 오빠가 나도 좀 경험을 쌓으라고 데려간대. 어차피 앞으로 이런 자리 자주 나가야 할 테니까.”
서예은은 가식적인 서지안의 미소를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주현진이 서지안을 동반하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였다. 최근 이 두 사람은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예은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지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어? 내가 남의 연인한테 빌붙는 것도 아니고.”
서예은의 차가운 반응에 서지안의 미소는 순간 얼어붙었다.
“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가족이잖아.”
서예은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가족? 서지안, 나는 서씨 가문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그쪽 일에 내 이름까지 섞어 넣지 마.”
서예은의 말에 안색이 확 바뀐 서지안이 뭔가 말하려는 그때, 주현진이 뒷좌석 반대편에서 몸을 내밀며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예은,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타.”
서예은은 아무 말 없이 앞좌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서지안이 주현진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인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주현진은 서예은을 향해 설명하듯 말했다.
“지안이를 데려가는 건 그냥 인맥 좀 넓히려는 거야. 곧 F&W 디자이너로 데뷔할 테니까. 그런데 넌 무슨 생각을 그렇게 더러운 쪽으로만 해?”
서예은의 눈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이미 침대 위에서 수없이 뒹굴었을 주제들이 더러운 게 뭔지는 알고 말해?’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들 일은 이제 자신과 무관했다.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고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다.
행사장에 도착하자, 세 사람이 함께 입장하는 모습에 주변 시선이 쏠렸다.
서예은은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고, 서지안은 화사한 핑크색 레이스 드레스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했다.
주현진은 턱시도 차림으로 두 여자 사이를 가로막듯 서서 사람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주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주 대표님 아니야? 여자를 왜 두 명이나 데리고 다니지?”
“얼마 전에 약혼자랑 헤어지고 옆에 그 여자랑 붙었다던데.”
“참 복잡한 관계네.”
서예은은 주변의 수군거림을 외면한 채 침착하게 바 테이블로 걸어가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들고 살짝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들은 소식에 의하면 박시우도 참석한다고 했었는데 정말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주현진은 서지안을 데리고 주요 인사들에게 인사하러 갔다.
서지안은 주현진의 팔을 끼고 어디 가나 귀여운 척하며 웃어 보였다.
이때, 장은주가 서예은에게 다가왔다.
그녀도 상사 지시로 이 만찬에 참석한 터였다. 장은주는 주현진과 서지안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예은아, 어떻게 된 거야? 주현진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어? 너랑 주현진이 사귄 걸 여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렇게 서지안을 데리고 다녀?”
서예은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뭐 어때? 이미 끝난 사이인데. 다만 저런 놈한테 낭비한 내 청춘이 아깝다.”
그때는 그 사랑이 그토록 아름다웠을 테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장은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솔로가 된 걸 축하해.”
그녀는 갑자기 흥분한 듯 말을 이었다.
“맞다. 오늘 밤 여기 유능한 남자들 많이 온대. 그리고 박시우도 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너무 기대된다. 말로는 그 사람 연예인보다 더 잘 생겼대.”
서예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박시우가 정말 올까?’
장은주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만히 있지 말고 가보자. 새 인맥도 좀 만들고.”
서예은은 원래 이 만찬이 지루할 거라 예상했지만, 장은주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몇몇 비즈니스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고 잠시 숨을 고르려던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여기 있었네.”
서예은이 고개를 돌리자, 서지안이 눈앞에 서 있었다.
“주현진은 어쩌고 나를 찾아온 거야?”
서예은은 비웃음이 섞인 눈빛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정교한 화장으로 다듬어진 서지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서예은은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지안은 천진난만한 척 웃으며 말했다.
“언니, 화내지 마. 현진 오빠는 사실 계속 언니를 걱정하고 있었어. 그저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서예은은 조소를 날리며 서지안의 말을 잘랐다.
“너 혹시 연기학원이라도 다녀? 연기 참 잘한다. 안 힘들어?”
서지안은 멈칫하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힘들긴. 아직 한 판 남았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서지안은 서예은의 손목을 붙잡고 함께 수영장으로 몸을 던졌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물에 빠진 서예은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 미친년!’
차가운 물이 몸을 휘감아 드레스는 금세 흠뻑 젖었고 머리카락은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어 흉하기 그지없었다.
서예은은 물속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서지안을 노려보았다.
“서지안! 너 진짜 미쳤어?”
서예은의 목소리는 억눌린 분노로 가득했고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물에 빠지는 소리에 많은 이들이 이쪽을 주목했고, 금세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방금 화장실에 다녀오던 장은주는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서지안, 저년만 있으면 분명히 사고가 나는 법이지.”
주현진도 상황을 알아채고는 급히 달려와 서지안을 건져 올렸다.
“오빠, 언니 탓하지 마.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린 건 아닐 거야.”
서지안은 새하얗게 질린 입술을 깨물며 주현진의 품에 기대어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