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배수혁이 걸음을 멈추고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다시 돌아섰다. 성아린이 마지막 남은 허황한 희망을 불태우는데 배수혁은 성아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지수아가 넘어진 곳을 더듬거리더니 귀퉁이가 타버린 부적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건 지수아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무탈함을 기원하는 부적이었다.
‘아, 다시 돌아온 게 부적때문이었구나.’
“하하... 하하하...”
성아린은 연기와 불빛이 한데 어우러진 난장판에서 눈물이 날 정도로 크게 웃었다. 전에는 손만 살짝 베어도 과분할 정도로 걱정하며 당장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남자가 지금은 화재 현장에 갇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다른 여자를 위해, 그 여자가 아끼는 부적을 위해 성아린보다는 부적을 먼저 찾았다.
부적을 찾은 배수혁은 다시 지수아를 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사라진 순간 불타는 대들보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무너지더니 성아린을 향해 덮쳤다.
눈을 질끈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별장으로 돌아온 뒤였다.
배수혁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투는 이상할 정도로 거리감이 느껴졌다.
“어제 화재라 상황이 너무 혼잡했어. 나도 네가 안에 갇혀있는 줄 몰랐다니까. 미리 알았으면 내가...”
‘알면 어쩔 건데?’
성아린이 속으로 이렇게 말하며 조롱의 의미로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지수아를 버리고 나를 구하러 왔을까? 아니. 넌 그러지 않았을 거야. 예전 같으면 마음속에 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필요할 때 바로 나타났겠지만 이제는 지수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잖아. 그런데 내가 보이겠어?’
너무 피곤했던 성아린은 배수혁과 말도 섞기 싫어 등을 돌리고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성아린이 핏기 없는 얼굴로 소통을 거부하자 배수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다가 결국 미간을 주무르더니 알약 몇 개를 침대맡에 놓아주며 말했다.
“약부터 먹어.”
앞으로 며칠간 배수혁은 드물게 자리를 떠나지 않고 별장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고 회사 업무도 서재에서 처리했지만 성아린은 여전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철저하면서도 차가운 무시가 가시처럼 배수혁의 가슴에 박혔다.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그렇게 다섯 날째 이어지던 침묵은 배수혁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고 침대맡으로 다가오면서 깨지고 말았다.
“성아린.”
배수혁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성아린은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내심이 바닥난 배수혁은 강압적으로 성아린의 어깨를 돌려 얼굴을 마주 보게 했다.
“나 봐. 내가 말했지.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수아라고.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내가 수아를 먼저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성아린은 그제야 천천히 눈꺼풀을 들고 평온한 눈빛으로 배수혁을 바라봤다. 그 평온함에 배수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올라도 성아린이 이런 태도를 보이니 해소가 되지 않았다.
성아린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던 배수혁은 끝내 손을 풀더니 일인극에 지쳤는지 미간을 주물렀다.
“너도 이제 괜찮아졌으니까 여기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겠다.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더니 아무런 미련도 없이 안방을 나섰다.
방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성아린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가볍게 중얼거렸다.
“배수혁. 나는 화난 게 아니라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린 거야. 그래서 기대도 원망도 안 하는 거지.”
그 뒤로 배수혁도 더는 나타나지 않았고 성아린의 세상도 조용해졌다. 상처를 치유될 동안 성아린은 때를 챙겨 먹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했다. 그러다 가끔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어쩔 수 없이 지수아의 인스타를 마주해야 했다. 피드는 배수혁과 함께한 달콤한 데이트 사진으로 도배되었는데 장소는 배수혁이 전에 성아린을 데리고 갔던 곳이었다.
산 정상에 위치한 레스토랑은 배수혁이 성아린에게 평생 함께할 것을 약속한 장소기도 했다. 바다. 다음으로 보이는 해변가 사진은 성아린과 함께 발자국을 찍었던 곳이었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소원 나무, 배수혁은 성아린과 함께 걸었던 자물쇠를 직접 끊어내고 지수아와 새로운 자물쇠를 걸었다. 그렇게 배수혁은 새로운 애인을 데리고 9년간 성아린과 남겼던 발자국 위에 새로운 발자국을 얹는 것으로 태연하게 두 사람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갔다. 마치 칠판에 남겼던 글자를 지워버리는 것처럼 아주 쉽게, 아무 미련도 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