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그 원인은 아주 간단했는데, 허가윤이 돌아오기 전까지 가문의 어른들을 대처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안소희는 그의 부모님들과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기에 마침 어울리는 사람이였다. 가끔은 안소희도 한마디 묻고 싶었다. 설마 내가 바보로 보이는 건가? 아니면 왜 나똥개는 그녀가 진심으로 그를 도와 집안 어른들께 그의 외도 사실을 숨겨줄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근데 오늘 그가 갑자기 얘기를 꺼내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반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가 쓰레기 같은 남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도, 약간의 감정 기복이 생기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였다. 가볍게 숨을 한번 내쉬고 안소희는 소파로 가서 휴대폰을 꺼냈다. 톡톡에 들어가 “마우스”라고 이름을 적어둔 사람을 찾은 뒤, 2년 동안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채팅창을 다시 열고, 문자를 편집하기 시작했다.【NA그룹이 요즘 무슨 어려움이 있는지 한번 조사해봐. 그리고 나영재도 말이야. 무슨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닌지.】 메시지를 보내자 마자, 상대방은 거의 1초만에 답장을 보내왔다. 마우스:【!!!!!!】 마우스:【소희 누나, 갑자기 죽었다 살아난 거야?】 마우스:【와우, 내 살아생전에 누나 메시지를 다시 받아볼 기회가 오다니. 2년 동안 도대체 어디 간거야? 어떻게 아무런 소식도 없을 수 있어?】 마우스:【우리가 정말 누나를 위해 비석이라도 곧 세울려고 했다니깐.】 안소희:“......” 그녀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고, 기분이 언짢은 듯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조사해.】 마우스:【옙!】 안소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문자를 기다렸다. 만약 나똥개가 자기한테 피해를 줄가봐 이혼할려고 하는거라면, 그녀는 과거의 모든 것들은 다 묻어두고, 심지어 그를 도와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쓰레기 같은 남자라면, 안소희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차버릴 것이다. 약 반시간 쯤 지나 휴대폰에 다시 문자가 왔다. 마우스:【어려움도 없고, 불치병도 없고, 아프지도 않아.】 마우스:【소희 누나, 근데 이건 왜 조사하라고 한거야?】 마우스:【근데 나영재는 정말 얼굴도 잘 생긴데다가 돈도 있으니 정말 누나랑 잘 어울려. 누나 원래 잘 생긴 사람 좋아한다고 했으니 한번 시도해보는게 어때?】 안소희는 그가 하는 질문을 그냥 무시하고, 바로 한마디 쏘아붙였다. 【넌 멍멍이랑도 잘 어울려.】 이 한마디를 보낸 후 그녀는 바로 톡톡에서 나갔다. 외부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은 오직 한가지 이유만 있음을 의미한다. 그건 바로—나똥개가 정말 쓰레기라는거! 마우스는 안소희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소희 누나가 왜 갑자기 불같이 화내지? 이 문제에 대해 지금의 그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안소희는 탁자 위의 이혼 합의서를 보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옆에 놓여있는 팬을 들어 바로 사인했다. 그리고는 바로 서랍에 넣어두고 샤워하러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휴대폰에 톡톡 메시지 99+, 부재중 통화 32개가 있었다. 안소희:“......” 안봐도 안소희가 본인한테 연락했다고 백은우가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린게 뻔하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마른 수건으로 젖어서 헝클어진 검은 긴 생머리를 닦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를 보려고 했다. 잠금 해제도 하기 전에, 바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 “쓰레기 아빠.” 2년 동안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그 발신인을 보노라니 안소희는 말 못할 감정에 휩싸였다. 그때 그녀는 엄마의 일로 인해 서울을 떠났고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안소희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도 안소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결국 전화를 받았다. 안소희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여보세요.” 인사가 끝나도,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매우 조용했다. 안소희는 그에게 그다지 인내심이 없어 그냥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 찰나에, 상대방이 잠긴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소희야.” 간단한 세글자였지만, 이는 안소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들을 불러일으켰다. 안소희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고, 그냥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은우가 너한테 연락했다는 얘기 들었어.”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져왔고, 그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있는 것만 같았다. “네가 나영재를 조사한다고 들었는데, 아빠가 뭐 도와줄건 없니?” “없어요.” 안소희는 그와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소희의 아버지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그 사람과 무슨 사이니?” “곧 이혼할 부부에요.” 안소희는 갑자기 폭탄선언을 했다. 소희 아버지:“!!!” 이혼이라고? 소희가? 부부라고? "너......" “별일 없으면 끊을게요.” 안소희는 더이상 그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소희 아버지는 재빨리 "잠깐만."이라고 했다. 안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맞은 켠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언제 돌아올거니?” “그 사람 집에 없어.” 소희 아버지는 그녀가 전화를 끊기라도 할가봐 급히 덧붙였다. “네 어머니의 물건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어.” 안소희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북받쳤으나 그냥 냉정하게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말을 마치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들고 있는 안소희의 아버지는 뭔가 애처로운 느낌이 들었다. 결혼에 대해선 아직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안소희는 그의 생각따윈 신경 쓰지 않고,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휴대폰을 비행모드로 설정하고, 머리를 말리고는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한잠 푹 자고, 다음날 아침 8시에 일어난 안소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씻고 밥을 먹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그녀는 특별히 연하게 메이크업도 했다. 탱탱하고 티없이 맑은 피부에 메이크업을 하니 한결 더 혈색이 도는 듯 했고, 입술은 도톰하여 가까이에서 봐도 입술결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일 매혹적인건 그녀의 예쁜 눈매였는데, 웃을 때면 마치 모든 것을 치유해줄 것만 같다. 나영재가 도착했을 때 안소희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앞머리도 깔끔하게 뒤로 빗어 넘기고는 검은색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나영재가 도착한 것을 보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옆에 두었던 외투를 어깨에 걸쳤다. 그 모습에서는 부잣집 아가씨의 아우라가 물씬 풍겼다. “가자.” 안소희의 손에는 가방이 들려있었다. 나영재는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있었고, 몸에 잘 맞춰진 양복은 그의 길쭉한 몸매를 잘 받쳐주었다. “오늘 못가.” 그 말을 들은 안소희는 의아해졌다. “오늘은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나영재의 낮은 목소리에는 냉랭함이 묻어있었고, 시선은 그녀에게 몇번이나 더 머물렀다. “내일 너랑 같이 갈게.” “나영재” 안소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호칭에 대해 나영재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 오늘 메이크업 했어.” 안소희가 그에게 귀띔하듯이 얘기했다. “순조롭게 이혼하고 싶으면, 당신의 그런 일들을 다 미루는게 좋을거야. 난 신용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별로거든.” 나영재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이해득실을 한번 따져보고는 나가서 전화를 걸었다. 허가윤이 병원에 가서 재검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가방을 들고 있던 안소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속으로 나영재에 대해 몇마디 욕을 퍼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맘 속에서는 첫사랑을 생각하고 있다니. 나영재는 소희가 언짢아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고, 다만 오늘 그녀가 너무 과분하게 이쁘다고만 생각했다. 그 모습은 또 예전의 온화한 모습이랑은 전혀 달랐고,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 그는 전화를 끊고 어디로 쇼핑을 가고 싶은지 물었다. 안소희는 강성의 최대 명품 백화점을 얘기했다. 쇼핑이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냥 물건을 사재기하러 갔다고 표현하는게 더 맞겠다. 10시가 되니, 뒤에 있는 4명의 보디가드 손에는 이미 물건이 가득했다. 시계, 주얼리, 가방, 옷…… 안소희는 살 수 있는 건 모두 다 챙겼다. 나영재의 휴대폰으로 결재 문자가 끊임없이 날아왔다. 또 다시 최고급 쥬얼리 샵에 들어가는 안소희를 보고 나영재의 낯빛은 가마솥마냥 검게 변했다. 쇼핑이니, 함께 있느니 했던 건 모두 다 핑계고, 안소희는 그냥 일부러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려고 했다는 걸 나영재는 그제서야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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