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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여민지에게 콕 집어 지명을 당하자 문가영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민지는 화려하게 생겼지만 깔끔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더욱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김 하나 없는 새하얀 셔츠에 하이웨이스트 검은 슬랙스가 그녀의 허리선을 완벽하게 돋보이게 했다. 문가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오만과 경멸이 담겨있었다. 불편한 눈빛이다. 언뜻 물어보는 것처럼 들리는 말도 조금의 배려가 없이 무심하게 통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진수빈을 돌아보니 마침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 시선은 문가영에게 1초도 머물지 않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환자 케이스 연구하는데 저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동의를 구하는 거죠?” 여민지가 가볍게 대꾸했다. “방 선생님께서 두 분 같이 가신다고 하던데요?” “제가 언제 저 사람과 같이 간다고 했죠?” 주고받는 말 속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정작 그들이 말하는 당사자인 문가영이 얼마나 난감한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직장 동료들도 진수빈이 약혼녀인 문가영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지금 그는 문가영의 체면은 조금도 생각지 않은 채 말하고 있었다. 동정과 조롱이 섞인 눈빛이 동시에 문가영에게 향하니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지만 그저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에 퍼지는 미세한 통증에도 문가영은 비참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힘겹게 목을 가다듬었다. “환자 케이스에 대해 논의하는 건 의사들 일인데 저한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어요. 여 선생님.” 여민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꾸했다. “하긴, 말해도 모를 테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진수빈을 돌아보았다. “갈까요?” 진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있던 의사들과 가다가 두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멈춰서서 문가영을 돌아보았다. 검은 눈동자와 살짝 찌푸린 미간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가영은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력 손상 때문인지 문가영의 눈동자는 탁한 기색 하나 없이 맑고 예뻤다. 진수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며 옆에 있는 방우지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같이 올라가서 얘기 좀 하지 않을래요? 선생님도 뇌수막종 환자 맡은 적 있잖아요.” 방우지는 어이가 없었다. “전 그냥 퇴근하고 집에 가고 싶지만 알겠어요.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같이 가죠.” 말을 마친 그가 진수빈 쪽으로 가던 순간, 밖에서 번개가 번쩍이더니 곧 다시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전북의 장마는 늘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막 걸음을 뗀 방우지가 뒤돌아 문가영과 함영희, 그리고 아직 떠나지 않은 간호사 몇 명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다들 돌아갈 때 조심해요. 특히 가영 씨는... 더 조심하고요.” 문가영의 청력 문제 때문에 동료들은 그녀를 무척 배려해 주었다. 특히 방우지는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자주 그녀를 챙겨주었다. 하지만 방우지조차 이런 날씨에 그녀 혼자 집에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진수빈은 모른다. 문가영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진수빈은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성큼성큼 자리를 떠난 뒤였다. 함영희는 문가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 선생님은 워커홀릭으로 유명하잖아요. 가영 씨...” 눈만 깜박이던 문가영은 함영희가 진수빈의 행동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달래는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러 차례 진수빈의 편을 들던 것처럼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알아요. 방 선생님까지 환자 케이스 분석하러 갔잖아요. 이번 환자는 많이 심각한 상태인가 봐요. 수고하세요.” 함영희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진수빈과 여민지의 말만 들어도 문가영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그녀조차 마음이 불편했다. 문가영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곧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전 그냥 간호사고 의사 일에 대해서는 모르니까 민폐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죠.” 거센 비바람에 집으로 돌아온 문가영은 거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씻고 청소를 마친 뒤 서랍에서 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문사라와 진수빈이 준 생일 선물이 들어 있었는데 전부 18살 생일에 멈춰버렸다. 문사라는 죽었고 진수빈은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니 좋은 기억은 전부 문가영의 18살 생일 이후로 끝이 났다. ... 역시나 진수빈은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병원에서 점심시간 때 문가영이 밥을 먹으러 가려는데 진수빈이 찾아왔다. 그가 손가락을 굽혀 데스크를 두 번 두드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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