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문 간호사님, 이제 보청기를 바꿀 때가 됐어요. 안 그럼 청력에 좋지 않아요.”
진료실에서 장 교수가 말한다.
맞은편에 앉은 문가영은 이제 막 근무를 끝내고 옷도 못 갈아입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장 교수님, 감사해요. 명심할게요.”
장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문 간호사님, 최근 검사를 해보니 인공와우를 최대한 빨리 이식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요즘은 이런 수술이 그리 비싸지 않아서 수술에 회복 기간까지 합쳐도 비용이 1억2천 정도밖에 들지 않아요.”
장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층 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문가영 씨 집안에서 이 정도 돈은 껌값이니 굳이 미룰 필요가 없죠.”
문가영이 처음 병원에 왔을 때 문씨 가문에서 수입 기기 두 대를 병원에 기증해 집안에 돈이 많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료실에서 나온 문가영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고 은행 앱을 눌러 잔액을 확인했다.
[11,201,166 원]
1년 동안 모은 돈이 고작 이게 전부였다.
장 교수 말대로 1억2천은 문씨 가문에서 껌값이지만 그녀에겐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문가영은 문씨 가문의 입양아로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선뜻 주는 것만 감사히 받고 먼저 손을 내밀지는 못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집안에서 주기 전에 그녀가 먼저 뭘 바란다면 주제넘고 배은망덕한 짐승이라고.
간호사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어느덧 7시가 다 되어 있었다.
전북은 요즘 이슬비가 계속 내려 우중충한 날씨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문가영은 문씨 가문이 아닌 병원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현관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문가영은 멈칫했다. 진수빈이 집에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비나 진흙이 묻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살폈다.
진수빈은 전북병원에서 신경외과 최연소 집도의로 유명한 신의 손이었다.
심각한 결벽증이 있었던 그는 조금의 더러움도 용납하지 못했다.
그는 문가영의 약혼자였고 양가 집안에서는 둘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문가영이 진수빈과 함께 사는 걸 허락했다.
두 사람의 약혼은 우연한 사고로 인한 것이었다.
문가영이 정리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데 현관의 불은 켜져 있었지만 거실은 어두웠다. 그래도 문가영은 소파에 있는 진수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수빈은 자는지 인기척이 들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문가영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지그시 감은 눈과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보였다.
병원에서 진수빈의 별명은 ‘금손 미남'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집도의라는 직책을 맡은 것도 있지만 주요하게는 얼굴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잘생긴 진수빈의 얼굴을 문가영은 그가 잠이 든 후에야 감히 이렇게 대놓고 바라볼 수 있었다.
진수빈이 학회 참석차 해외에 나갔다가 이제야 돌아와서 얼마 만에 얼굴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
돌아오자마자 또 큰 수술이 잡혀 어제오늘 수술대에서 6, 7시간을 보냈다.
눈가에 푸른 그림자가 드리우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게 잠자리가 영 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실의 창문이 열려 있었고 찬바람과 뒤섞인 빗방울이 날려 들어왔다.
진수빈은 셔츠 하나만 입었고 문가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작은 소파 위에 평소 그녀가 사용하는 담요로 시선이 갔다.
그녀는 망설이며 작은 담요를 집어 들었지만 웬일인지 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1인용 소파에 앉아 담요를 움켜쥔 채 다시 한번 진수빈을 바라보았다.
진수빈이 피곤하다는 걸 알았기에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쉴 시간이 너무 없었으니까.
그때 테이블에 올려둔 그의 휴대폰이 진동하자 멈칫한 문가영은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끄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묵직하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뭐 하는 거야?”
고개를 돌린 문가영은 얼떨결에 진수빈과 눈이 마주치자 마음이 흠칫했다.
어두운 거실에서 검고도 반짝이는 남자의 눈이 아무런 감정 없이 문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문가영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하려 했다.
“저, 전...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자고 있으니까 제가...”
진수빈에게 설명하려 했지만 긴장한 탓인지 말을 더듬었다.
진수빈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며 문가영이 뻗은 손에서 멈췄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문가영은 오른손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움찔하며 손을 움츠린 그녀는 더러운 물건인 듯 손을 옷에 마구 문지르고 시선을 들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전 그쪽 물건 안 만졌어요.”
문가영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고 진수빈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원래도 아무 감정이 없는 눈동자가 무심해 보였다.
“내 물건 만지지도 말고 가까이 오지도 마. 똑같은 말 몇번이나 더 해야 해?”
문가영은 진수빈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명하고 싶은데 말주변이 없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진수빈은 자기 물건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강조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반년 넘게 약혼한 사이로 살았어도 집 안 거의 모든 물건에 라벨이 붙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것만 만질 수 있고 나머지는 조금도 건드려선 안 된다.
심지어 진수빈이 자주 머무는 공간에는 그녀가 들어갈 자격조차 없었다.
이 넓은 거실에도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건 고작 1인용 소파뿐이었다.
심각한 결벽증을 갖고 있는 진수빈은 진동하는 휴대폰을 힐끗 쳐다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꾹 참고 전화를 받은 그는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바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새 휴대폰 사서 가져오세요.”
그러고는 옆에 있는 소파를 힐끗 보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람 불러서 소파도 바꾸고 소독하세요.”
말하는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문가영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조금 전 그녀가 가져온 담요 끝자락이 어느새 진수빈 쪽 소파에 살짝 걸쳐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말하지도, 진수빈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개를 숙여 오른손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등 뒤로 가져가더니 왼손을 오른손 소매에 마구 문질렀다.
사실은 진수빈에게 말하고 싶었다. 자신은 더럽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