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전동 스쿠터의 속도를 간과했던 이진아는 앞으로 튀어 나가다가 그만 승용차를 들이박고 말았다.
바닥에 넘어지면서 무릎이 까진 바람에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다. 승용차 주인이 차에서 내리며 버럭 화를 냈다.
“스쿠터를 왜 그딴식으로 타? 저승길에 빨리 가고 싶어서 그래? 재수 없어서 원. 이거 금방 뽑은 새 차란 말이야. 당장 배상해.”
차 로고를 힐끗 보았는데 마세라티였다.
‘망했다. 2백만 원으로는 턱도 없겠는데?’
순식간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누가 재수 없게 새 차를 들이박았는지 구경하고 있었다.
남자가 이진아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윽박질렀다.
“빨리 돈 물어내.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녀는 다리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자세를 바꿨다.
“2백만 원이면 될까요?”
그러자 남자가 어찌나 화를 세게 내는지 얼굴마저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날 거지 취급하는 거야?”
그 시각 강현우 쪽의 신호등이 바뀌었다. 사고 현장을 쳐다보던 그의 두 눈이 어두워졌고 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주지훈이 액셀을 밟으려던 그때 강현우가 말했다.
“가서 해결해줘.”
그는 핸들을 꽉 잡고 뭐라 말하려다가 결국 참고 차에서 내렸다.
바깥 날씨가 무더워서 이진아의 이마가 어느새 땀범벅이 되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한 젊은 남자가 다가와 정중하게 말했다.
“일단 신고하죠. 얼마면 됩니까? 제가 대신 배상하겠습니다.”
사고를 당한 남자는 욕설을 퍼부으려다가 주지훈이 수십억 원대의 한정판 자동차에서 내리는 걸 본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회암시에 단 한 대뿐인 귀한 차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교통경찰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남자가 말했다.
“그럼 2천만 원 주세요. 계좌 이체로.”
주지훈이 돈을 이체하고 돌아서려던 그때 이진아가 그를 불렀다.
이진아는 오늘 운동복 스타일의 캐주얼룩을 입고 있었는데 가느다란 허리와 늘씬한 다리가 더욱 돋보였다.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코끝의 점 때문에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기... 지금 돈이 그렇게 많이 없어요.”
그녀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의 한 자동차에 향했다. 왠지 그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주지훈이 손을 내저었다.
“갚을 필요 없어요.”
이진아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주지훈은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진아가 자동차 쪽으로 걸어갔다.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나중에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갚을게요.”
주지훈의 두 눈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모른 척하긴. 돈이 생기면 갚겠다고? 이씨 가문의 아가씨가 2천만 원도 없다는 게 말이 돼?’
주지훈은 이진아의 연기에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이진아 씨, 연기가 과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요. 전 돈을 갚을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에 저희 차를 보면 멀리 떨어져 주세요. 이진아 씨의 재수 없는 기운이 저희한테까지 옮겨져서 불행해질까 봐 무섭거든요.”
이진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기억을 잃어 이 사람이 누군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를 이렇게 싫어하면서 왜 도와준 걸까?
그녀는 시선을 늘어뜨렸다가 문득 뭔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절 싫어한다면 돈을 더 갚아야죠. 연락처 알려주세요. 알려주지 않으면 차 안에 있는 저분한테 물어볼 겁니다. 연락할 방법은 알아야 하니까요.”
주지훈은 이진아가 강현우를 만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결국 싫은 티를 내면서 숫자를 적어주었다.
이진아가 연락처를 받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에 주지훈은 순간 멍해졌다.
‘예전에는 누굴 만나든 거들떠보지도 않고 예의도 없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이내 코웃음을 쳤다. 강서준을 쫓아다니기 위해 생각해낸 새로운 수작이라고 짐작했다.
회암시에 이진아의 됨됨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