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심윤서는 어릴 때부터 예쁜 얼굴로 인해 수많은 이성의 관심을 받았다.
열여덟 살 대학에 입학하는 해에 평소 순종적이던 그녀는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찾아가 일부러 추하게 보이는 화장을 하고 심씨 가문의 딸이라는 신분까지 숨긴 채 홀로 부산의 천경대학교에 입학한 것이었다.
대학 생활 2년 동안 심윤서는 더 이상 남자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고 조용히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던 대학 2학년 때 기숙사 룸메이트와 함께 바에서 새해를 맞이하던 중 일이 터졌다. 몇몇 남자가 룸메이트에게 억지로 술을 권했던 것이었다.
심윤서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무슨 짓이에요? 친구가 싫다는데 왜 계속 그래요?”
그들은 심윤서를 비웃듯 쳐다보며 말했다.
“이봐 너보고 마시라는 것도 아닌데 끼어들지 말지.”
그들이 심윤서를 밀치자 그녀는 비틀거리다 낯선 이의 품에 부딪혔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보다 몇 살 많아 보였고 눈빛에는 호기심이 어른거렸다.
“무슨 일이지?”
목소리는 좋았지만 말끝을 흐리는 버릇이 있었다.
“미성년자가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
심윤서는 멍하니 있다가 얼른 대답했다.
“저 21살이에요. 어려 보일 뿐이지.”
말이 끝나기 전에 남자가 갑자기 몸을 굽혀 그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져 심윤서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주근깨 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왜 좀 낯이 익지? 혹시 천경대 학생이야?”
심윤서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러면 나랑 같은 학교네.”
그는 몸을 돌려 말썽을 부리던 남자들을 향해 태연히 말을 이었다.
“너희들, 우리 학교 애들한테 무슨 짓이야?”
방금까지 거만하던 그들은 순식간에 얼굴빛이 굳었다.
“같은 학교인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그들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고, 심윤서는 나중에야 그 남자의 이름이 전우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우빈은 부산에서 이름난 부잣집 도련님으로 제멋대로이고 거침없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2년 전 갑자기 천경대에 건물 한 채를 기부하고 대학원에 들어와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평소 수업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고 가끔 슈퍼카를 타고 캠퍼스를 누비며 소란을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그런 전우빈에게 반하는 여학생들은 끊이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이 도서관을 가득 메울 정도라고 했고 그를 위해 자살을 시도한 소녀까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새해 카운트다운 종이 울리는 순간 심윤서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도 그중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녀는 짝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전우빈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아침을 챙겨 주고 종이학을 접어 주고 별똥별이 지나갈 때면 그의 이름을 빌었다.
전우빈이 농구 시합을 할 때 슬쩍 그의 가방에 우유를 넣어 주다가 그와 그의 친구들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친구 중 한 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봐, 주근깨. 우리 우빈이는 말차 안 마신다니까?”
그러나 전우빈은 아무 말 없이 심윤서가 준 말차 우유를 한입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딸기 맛이 더 좋아.”
그의 입김에 스민 말투가 마치 그녀가 평소 쓰는 딸기 향 세제 냄새처럼 은은하게 퍼졌다.
“너 같은 딸기 향.”
심윤서는 가슴이 콩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전우빈에게 완전히 빠져버렸음을 깨달았다.
발렌타인데이 때 심윤서는 용기를 내어 전우빈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평범하고 재미없는 자신이 거절당할 거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최소한 마음을 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전우빈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심윤서, 나랑 사귀면 괴롭힘당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심윤서는 가슴이 벅차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그녀는 그 질문을 그저 사랑의 무게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둘이 사귄 후 예상보다 심한 일들이 벌어졌다. 과제는 찢겨 나갔고, 사물함에는 페인트가 뿌려졌으며 식당에서는 전우빈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그녀를 발로 걸어 넘어뜨리기도 했다. 가장 심했던 것은 전우빈의 원한이 있는 자들에게 납치되어 하루 종일 창고에 갇혔던 일이었다.
구출된 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전우빈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윤서야, 고생했어.”
한마디에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디어 광고학과의 퀸카 강하연이 인공 호수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심윤서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호숫가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전우빈이 한 남자를 땅에 내리누르고 마구 때리는 모습이 있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평소의 느긋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었다.
“내가 경고했지? 강하연한테 다시 손대지 말라고.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남자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주위 사람들이 말려서야 손을 뗀 전우빈은 강하연을 안아 일으켰다.
그가 심윤서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는 힘없이 목소리를 냈다.
“전우빈.”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강하연을 업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서야 심윤서는 얼굴이 피범벅이 된 남자에게 다가갔다.
“왜 이런 거예요?”
남자가 피로 얼룩진 얼굴을 들며 비웃었다.
“전우빈의 새 여자 친구? 내가 왜 강하연을 공격했냐고? 당연히 복수하려고 한 거지. 내 동생이 전우빈 때문에 자살했어.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전우빈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강하연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 부잣집 망나니가 왜 천경대에 나오겠어? 분명히 강하연을 따라온 거야. 하지만 전우빈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든 결국 모두 강하연을 노렸지. 결국 강하연은 그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에 걸려 휴학하게 되었고, 전우빈과도 이별하게 되었어.”
남자는 심윤서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훑었다.
“너 따위는 그냥 방패막이일 뿐이야. 전우빈이 진짜 걱정하는 건 강하연뿐이지.”
심윤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고백할 때 전우빈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건 걱정이 아니라 사전 경고였다.
하늘이 어둡게 변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폭우를 맞으며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그녀의 얼굴에 바른 화장이 모두 씻겨 번졌다.
겨우 기숙사 앞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왔다.
“심윤서, 잠깐만!”
전우빈이 건물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심윤서, 네 얼굴이 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