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사람들은 모두 말하길 세자는 세자빈을 목숨처럼 아낀다고 했다. 송유서는 세자의 후궁으로 책봉된 숙원이었다.
그녀는 다섯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세자의 품에 안겨 세자빈에게 보내져 길러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울지도, 떼를 쓰지도, 다투지도 않았다. 마치 제 몸에서 나온 핏줄들이 자신과는 큰 연이 없는 듯했다.
다섯 번째 아이마저 안겨 떠나던 그날이 되어서야 송유서는 산후로 쇠약한 몸을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중전의 처소로 향했다.
“중전마마.”
송유서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하였으나 목소리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소첩은 이미 세자저하를 위하여 다섯 아이를 낳았사옵니다. 부디 중전마마께서... 소첩을 놓아주시어 진정 마음을 준 이를 찾아 떠나게 해주시옵소서.”
중전은 몸은 여위었으나 눈빛만은 유난히 단단한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숙원, 동궁전에 들어온 지도 여러 해이지 않느냐. 밤낮으로 세자의 얼굴을 마주하였거늘, 정녕 원에게 단 한 점의 연정도 없단 말이냐?”
송유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은 몹시도 가벼웠으나 조금의 여지도 없는 단호함을 품고 있었다.
“하면... 네가 낳은 다섯 아이는 어찌할 셈이냐? 모두 네 몸에서 난 핏줄인데 너는... 조금도 아쉽지 않단 말이냐?”
‘내 아이들이라...'
송유서의 가슴이 갑자기 죄어들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심장을 거칠게 움켜쥔 듯하여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 아이들은 그녀가 힘들게 배 속에 품고 저승 문턱을 한 차례 넘나든 끝에야 낳은 그녀의 핏줄이었다.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몰래 작은 배냇저고리를 숨겨 두었고 둘째 아이 때에는 태발 한 가닥을 남겼다. 셋째에 이르러서는... 그녀는 감히 그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마음에 담는 순간 다시는 그 아이들을 모질게 대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그녀의 곁에 없었다.
아이들은 최윤영의 슬하에서 길러지며 최윤영을 어머니라 불렀다.
생모인 그녀는 아이들의 삶 속에서 흐릿하고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그림자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모두 세자저하께서 데려가셨고 저들에겐 자애로운 어미가 있어 아무 탈 없이 귀히 자랄 것입니다. 소첩은... 그것으로 만족하옵니다.”
중전은 그녀의 결연한 얼굴을 바라보며 더는 붙잡을 수 없음을 알았다.
“되었다. 네가 맡은 바는 이미 다하였으니 이만 너를 놓아주마. 허나 지금은 몸이 이리도 허하니, 남은 산후조리는 마치도록 하여라. 그 뒤에 이곳에 와 패를 받아 출궁하여라. 그 후부터는 너는 더 이상 숙원 송씨가 아니다. 너는 자유인 것이니라.”
‘자유라니.'
그 두 글자는 송유서의 마음을 짓누르던 두꺼운 먹구름을 벼락이 내려친 것처럼 갈라냈고 가뭄 끝의 단비 같기도 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믿기 어려운 홀가분함이 한순간에 몰아쳐 지난 오 년의 답답함과 인내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송유서는 비틀거리듯 다시 몸을 낮춰 절을 하며 목이 멘 채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봉의전을 나설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었고 길게 뻗은 궁길을 따라 그녀는 벽을 짚고 천천히 걸으며 오 년 전을 떠올렸다.
그 무렵 도성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세자 이원과 최윤영이 소꿉동무로 자라난 천생연분이라는 사실을. 이원은 혼례를 치르던 날 문무백관 앞에서 ‘단 한 사람만 마음에 두겠다'라는 맹세까지 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최윤영이 동궁전에 들어온 지 삼 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었다.
중전은 속이 타들어 갔다. 왕실의 혈통을 염려하였고 이원의 세자 자리가 흔들릴까 봐 더 두려웠다. 끝내 중전은 최윤영의 목숨을 담보로 삼아 이원에게 후궁을 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이원은 처음에 맞서고 다투었으나 끝내는 물러섰다.
그는 신하들이 정성껏 추려 올린 규수들의 초상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지 않고 집안 또한 평범한 여인을 가리켰다. 바로 공조 참판의 여식, 송유서였다.
중전이 송유서를 불러들였을 때 송유서는 바닥에 엎드린 채 말했다.
“소녀는 혼인을 원치 않사옵니다.”
송유서에게는 이미 연심을 품은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는 병마절도사 댁 젊은 무관 심하진이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 이미 연정이 싹텄고 아버지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중전은 조금도 급해 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 천천히 차를 마시며 말했다.
“내 듣자 하니 병마절도사 집안의 젊은 무관이 다음 달이면 변방으로 간다지? 그곳은 검과 비명만 가득한 곳이라 만에 하나 변고가 생긴다면...”
송유서는 그 말에 바로 고개를 확 들었다.
“네가 동궁전에 들어가 아이 다섯을 낳아 왕실의 혈통을 잇기만 한다면...”
중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내 너를 놓아주마. 이후에 네가 어떤 사내를 찾아 떠나든 막지 않겠노라 약조하겠다.”
송유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손바닥에는 손톱이 깊이 파고들어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허나 네가 혼인을 거부한다면...”
중전이 덧붙였다.
“지금 당장 심하진의 군문에 손을 대어, 그를 변방에서 죽게 만들 것이다.”
“너무 원망하지 말아라. 이원은 세자빈을 목숨처럼 여긴다. 어렵사리 너를 택한 이상, 왕실의 혈통을 위해 너는 반드시 동궁전에 들어가야 한다.”
송유서는 바닥에 꿇어앉은 채 온몸이 얼음처럼 식어 있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것은 상의가 아니라 명이었다는 것을. 자신 한 사람의 혼인과 몇 해의 세월로 마음에 품은 이의 안위를 바꾸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눈동자에는 무감각한 순종만이 남아 있었다.
“소녀...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송유서는 결국 이원과 혼인했다.
하루라도 빨리 맡은 바를 끝내고 떠나기 위해 그녀는 온갖 방법을 다해 이원의 눈길을 끌고 그와 잠자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차츰 궁궐 안에는 소문이 퍼졌다. 새로 들어온 후궁 송씨는 요사스러운 여인으로 세자저하를 지극히 사모하여 총애를 얻고자 수단과 체면을 가리지 않는다고들 했다.
송유서는 그 억울함을 털어놓을 곳도 말할 길도 없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몸은 말을 들었다. 이원의 기력이 왕성했는지, 혹은 그녀가 잉태하기 쉬운 체질이었는지 머지않아 첫 아이를 품게 되었다.
해산하던 날 이원은 찾아왔으나 그저 문밖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힘차게 울며 태어났고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그녀가 한 번 안아 볼 새도 없이 이원은 안으로 들어와 쇠약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세자빈의 곁이 적막하다. 오래전부터 아이를 원해 왔으니 이 아이는 세자빈의 자식으로 두도록 하겠다.”
그녀는 피로 얼룩진 자리 위에 누운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궁인들이 작은 포대를 안고 떠나는 모습을 보았으나 반대의 말 한마디조차 꺼낼 수 없었다.
둘째 아이 역시 사내아이였다.
이원은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세자빈이 큰아이에게 벗을 붙여주고 싶다 한다. 이 아이 또한 세자빈의 곁에서 기르게 하겠다.”
셋째, 넷째... 이유는 달랐으나 결과는 늘 같았다.
아이는 태어나 울음이 채 잦기도 전에 말끔히 안겨 떠나 세자빈의 처소로 보내졌다. 그러다 다섯째에 이르러서야 계집아이가 태어났다.
이원은 이번에도 아이를 데리고 떠나려 하였다.
떠나기 전 상 위에 누워 얼굴에 핏기 하나 없고 눈빛마저 텅 빈 송유서를 바라보며 그의 마음 한편에 드물게 연민에 가까운 감정이 일었다.
그는 포대를 안은 채 잠시 망설이다가 약조를 하나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다음 아이는, 반드시 네가 직접 기르게 하겠다.”
송유서는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원은 준수한 용모를 지녔다. 날카로운 인상의 검은 눈썹과 별처럼 빛나는 눈, 곧은 콧대에 세자의 기품이 서려 있었고 아기를 안은 지금은 얼굴의 선마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나 송유서의 마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왜냐하면 더는 다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지막 계집아이로 임무는 끝났다.
이 동궁전의 모든 것, 차가운 전각과 무심한 세자, 알아볼 수조차 없는 핏줄들... 그 어느 것도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젊은 무관은 여전히 피로 가득한 변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을 떠날 것이었다.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