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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덕안 또한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 “하지만 저하, 숙빈마마께서는 막 산후를 겪으신 터라 기력이 몹시 허하십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저하를 위해 다섯 분의 왕손을 낳으셨으니 공이 없다 해도 고생은 적지 않으셨사옵니다. 소인이 보기에도 숙빈마마께서는 저하를 지극히도 사모하십니다. 그리고 저하께서도 숙빈마마께... 전혀 마음이 없으신 것은 아니지 않으십니까. 차라리..” “상선!” 이원의 목소리가 돌연 차갑게 식었다. 미처 감추지 못한 동요가 섞여 있었다. “허튼소리 말라! 내가 숙빈에게 무슨 감정이 있단 말이냐? 여기 남아 있는 것도 그저 목숨에 탈이 없는지만 확인하려는 것뿐이다. 혹여라도 일이 생기면 어마마마께서 또 이 일을 구실 삼아 빈을 곤란하게 하실까 염려되어서다.” 그의 말투는 단호했고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듯 이어졌다. “숙빈이 나를 연모하든 말든... 그것은 숙빈의 일이다. 나의 마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자빈 한 사람뿐이다.” 덕안은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으나 끝내 한숨만 내쉬고 입을 다물었다. 전각 안은 고요해졌다. 잠시 후 송유서는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원이 자리에서 일어난 듯했다. 그는 침상 곁으로 다가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송유서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 위에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인지 의식 없는 송유서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몸조리나 잘 하여라. 더는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곧 발소리가 울리며 점차 멀어졌다. 그가 완전히 떠났음을 확인한 뒤에야 송유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장막 위 수놓인 무늬가 흐릿한 시야 속에서 어른거렸다. 뺨은 몹시 아팠고 가슴속은 텅 빈 듯 무감각해 분노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 깊은 피로와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뿐이었다. 그 뒤 며칠 동안 이원은 여러 명목을 내세워 적지 않은 보상품과 하사품을 보내왔다. 비단과 명주, 금은 장신구가 방 반을 가득 채웠으나 송유서는 그것들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의 이런 행동이 최윤영을 대신한 보상인지, 아니면 그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주 미미한 마음과 죄책감 때문인지 따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루빨리 몸을 회복해 이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송유서는 문을 닫고 틀어 걸어 외부와 왕래를 끊은 채 조용히 산후조리를 하며 바깥일에는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최윤영의 생신 당일이 되어 숙빈인 그녀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연회는 동궁전에서 가장 큰 화청에서 열렸고 그 화려함은 극에 달했다. 이원이 최윤영을 얼마나 총애하는지는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연회의 규모도 성대했을 뿐 아니라 생신 선물 또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값비싼 보석도 희귀한 골동품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려 십여 장 길이에 달하는 한 폭의 두루마리 그림이었다. 그 그림에는 이원이 직접 붓을 들어 어린 시절부터 혼례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세월을 하나하나 담아냈다. 한 획 한 획마다 심혈이 깃들어 있었다. 두루마리 끝에는 그의 친필로 적힌 맹세가 있었다. [그대를 안사람으로 맞은 그날부터 나는 의심을 배운 적이 없느니라.] 그처럼 존귀한 신분으로 이런 수고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연회에 모인 이들은 모두 감탄과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윤영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이원의 곁에 몸을 기댄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처럼 보였다. 오직 송유서만이 눈에 띄지 않는 하석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식어가는 단술을 천천히 들이켜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무희들이 나와 춤을 추었다. 춤사위는 유려했고 악공들이 켜는 곡조 또한 사람을 사로잡았다. 최윤영은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입술을 삐죽이며 유리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를 살피고 있던 이원이 곧바로 눈치채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최윤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응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저하, 이것이 바로 경성무라 하지 않습니까? 허나 선두에 선 무희를 보니 용모가 기껏해야 단정한 정도인데 어찌 도성 제일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시선이 흐르듯 옮겨가다가 하석의 송유서에게 멈췄다.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웃음이 걸렸다. “제 소견으로는 숙빈이야말로 용모가 곱습니다. 저 무희와는 견줄 수조차 없지요. 혹... 숙빈이 무희의 복색으로 갈아입고 이 경성무 한 곡을 추어 연회의 흥을 돋워 줄 수는 없겠습니까?” 이 말이 떨어지자 연회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음악과 춤마저 멈췄다. 무희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의 흥을 돋우기 위한 존재일 뿐이다. 숙빈마마를 무희처럼 내세운다면 이 일이 퍼졌을 때 송유서는 상경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이원이 송유서를 향해 일말의 배려라도 남아 있다면 동궁전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모든 시선이 이원에게로 쏠렸다. 과연 이원의 안색이 가라앉으며 미간이 굳게 다물렸다. 그는 최윤영을 바라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세자빈, 그만하게. 숙빈은...” “저하...” 최윤영이 길게 소리를 끌며 그의 말을 끊었다.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지며 목소리에는 서러움과 응석이 섞였다. “오늘은 소첩의 생일입니다. 소첩은 그저 흥겨운 춤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숙빈의 춤사위가 뛰어나다는 말은 이미 들은 바 있는데 설마 저하께서는 이 작은 바람조차 들어주지 않으시렵니까? 아니면... 저하의 마음이 이미 다른 이를 향해 기울어 소첩의 심정은 돌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마지막 말은 갈고리처럼 이원의 심장을 정확히 찔렀다. 이원은 눈물 맺힌 최윤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과거의 맹세와 그간 그녀에게 진 빚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미약한 망설임은 순식간에 눌려 사라졌다. “숙빈, 세자빈이 보고 싶다 하니... 복색을 갈아입고 한 곡 추어라.” 송유서는 술잔을 쥔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이원을 향해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 “소첩... 명을 따르겠습니다.” 송유서는 곁전으로 가 무희의 복색으로 갈아입었다. 그 옷자락은 가볍고 화려했으며 산후의 여운이 남아 있음에도 여전히 가냘픈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창백하지만 빛을 가릴 수 없는 청아한 얼굴과 어우러져 위태로울 만큼 서늘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곡조에 맞춰 춤을 추는 그녀의 몸짓은 가볍고도 매끄러웠다. 돌아보는 시선 하나, 회전하는 동작 하나마다 타고난 운치가 서려 있었다. 앞서 춤을 추던 무희보다 훨씬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연회장 안에서는 박수 소리 하나 울리지 않았다. 오직 낮은 속삭임과 동정 혹은 경멸이 섞인 시선만이 오갔다. 이원은 상석에 앉아 연회 한가운데서 춤추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녀는 울지 않는 것이냐, 왜 한마디 항의도 하지 않는 것이냐, 왜 너는 거절의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이냐.’ ‘이토록 나를 연모하는 것인가?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만큼?’ 아이를 빼앗겼을 때도 송유서는 순순히 따랐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라 해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원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불쾌함이 차올랐다. 숨이 막힐 만큼 무겁게 눌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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